<우유, 피, 열>

아주 매혹적인 단편들의 향연

by 초콜릿책방지기

<우유, 피, 열>이라는 세 단어의 나열로 시작하는 이 단편집은 그 단어들이 주는 이미지가 어긋난다는 점에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각 단어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세 단어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생긴다는 점에서 일단 성공적이다. 그리고 표제작이 단편집의 첫 수록작이라서 궁금증 바로 해소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읽게 된다.


그런데 일단 <우유, 피, 열>을 읽고 나면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이어지는 단편을 서둘러 읽을 수밖에 없다. 작가가 그려내고 싶은 세계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단편 하나로는 충분히 알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유, 피, 열>을 읽으면 열세 살의 에바와 이제 막 열네 살이 된 키라의 세계에 진입하게 된다. 잊고 있었지만 기억할 수 있는, 어린아이와 어른의 중간에 있는 그 어중간하고 무모하고 불안정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시간 속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그 시간이,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되어 간 호텔 옥상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키라가 뛰어내려 죽어버리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끝나 버린다. 어른들은 당연히 그 이유를 알 수 없고, 에바는 키라가 죽은 이유가 단지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키라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던 키라 엄마가 딸이 죽고 난 후 혼자 울고 있는 것을 본 에바는 그제야 자신에게 지나치게 간섭한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행동이 어쩌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세 단어의 조합은, 순수한 어린아이를 의미하는 우유에 혈통 혹은 가족을 상징하는 피를 섞으면 뜨거운 열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일까. 이건 사실 농담에 가까운 말이지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세 단어는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작품집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가족에 관한 것이며, 주제는 ‘어린 생명이 거름이 되어 가족을 이루게 되고, 가족은 어리고 새로운 것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봐야 한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재미난 것은 태어날 생명의 거름이 되는 것이 어른이 아니라, 어른에게 거름이 되어주는 어린것들이라는 전복된 의미다.


<향연>에서 레이나와 히스는 아이를 간절히 원한다. 임신 초기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아이를 유산한 레이나는 이후 여덟 달이 지나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이의 몸 조각들이 보이는 환영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레이나가 어느 날 수족관에 가서 자신의 다리를 뜯어먹는 문어를 보며 하는 생각은 이렇다. “그러나 나는 이 행위가 자연스러운 것임을, 그 아래엔 근육이 있고 빛을 발하는 어떤 진실이 있음을 안다. 나는 이미 그 생명체의 말을 들었다. 가끔은 부서진 몸을 먹어 치우고 세포 하나하나를 소화시킨 뒤 새로운 시작을 맛보아야만 하는 거야.”(62) 이미 유산한 아이가 거름이 되고 난 후에 새로운 아이가 오는 셈이다.


<혀들>에 나오는 제이는 이 시대에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종교적 전통에 대해, 가부장적인 힘에 대해 반기를 드는 어린 전사다. 제이는 부모님과 목사를 비롯한 기존 세계와 질서가 잘못되어 있다는 걸 느끼지만 어리기 때문에 무력한데, 그렇다고 순순히 그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교회에 불을 지르려 하거나, 동생을 때린 아이를 찾아가서 겁을 준다.


<천국을 잃다>의 프레드와 글로리아는 거울의 반대쪽을 보여주는 것 같다. 35년간 트럭 운전사를 하면서 프레드는 편하게 살고 싶어서 아이를 갖지 않고 집을 사고 옷을 산다. 암이 재발한 글로리아는 이제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프레드는 혼자 남겨지는 것도 싫고 글로리아 앞에서 슬픔을 내색하는 것도 싫다. 차라리 자신이 아직도 젊은 여자에게 먹힌다고 착각하며 살고 싶다. 바텐더 힐다가 손님에게 보이는 호의를,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은 돈 좀 있는 중년 남성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긴 하다. 하지만 프레드에게 엄밀하게 남은 현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텅 빈 집이다. 희생하지 않은 곳에 가족은 없다.


<적들의 심장>의 프랭키와 마고처럼, 엄마와 딸은 연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프랭키가 요리사의 꿈을 희생하고 가족을 이루었다가 자신을 다시 찾아가려고 할 때, 마고는 프랭키의 손을 잡는다. 처음부터 잡아주지 않더라도 결국은 잡게 된다. 가부장의 세계 혹은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가족으로부터의 독립 못지않게 여성끼리의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 덕분이다. 클라인 선생님도 마고를 선택하지 않고 자기 가족을 지킬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배의 바깥에서>에 나오는 두 아이, 아홉 살인 샤일라와 열 살인 트위트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물려줘야만 하는 것에 대해 말해준다. 부모가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그 피를 이어받은 트위트마저 그렇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나처럼 버림받은 트위트에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아홉 살인 샤일라다.


<스노우>에서는 스물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한 데릭과 나의 결혼생활이 쉽게 흔들리지만 스노우라는 신비로운 여자의 도움으로 다시 의미를 찾게 된다는 사랑스러운 이야기다. <필요한 몸들>은 임신했지만 아이를 낳을지 말지 결정하지 못하는 빌리의 이야기다. 빌리는 어릴 때 엄마인 콜레트가 자신과 이부동생인 바이올렛을 향해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어서, 아이를 낳는 것을 망설인다. “난 너를 사랑해. 하지만 가끔은 네가 하나도 안 좋아.”라는 엄마의 말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엄밀히 말해 그것이 진실이지만, 진실을 수용하는 것이 가장 어렵기 때문에 빌리는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물보다 진한>의 루카스와 나는 어릴 때부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교육을 받으며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다. 학대의 실체는 묘하게 감추어져 있지만 루카스와 내가 그것을 감내하지 않았다면 이들을 가족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색다른 것들>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가면을 쓰고 은밀하게 모이는 사람들이라는 설정은 그리 특별할 게 없지만, “우리는 늘 어린 것을 먹어오지 않았던가?”하는 마지막 문장 하나가 작품집 전체를 완성해 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단편인 <뼈들의 연감>은 정상 가족의 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4인 가족에 전업 주부가 있는 키트의 가족과 할머니와 나, 언제나 떠돌아다녀서 가끔 얼굴을 볼 수 있는 엄마 헬렌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대비는 새로운 것이 없지만, 뼈만 남은 상태로 가서 본다면 거기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는 새롭다. 게다가 헬렌이 전업 주부를 길들인 짐승으로 말하는 대목은 가족이라는 틀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 단편에서 화자는 어린 ‘나’이기 때문에 어린 시선이 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들이 거름이 되어서, 앞으로 올 새로운 가족 형태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희망도 품게 된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우유와 피와 열은 모두 동일하고 균일하게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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