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젊게 하라!
커트 보니것은 제법 알려진 작가다. 그의 작품들이 제법 눈에 익고 뭔가 익숙하다. 그런데 정작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다. 언젠가 『제5도살장』을 조금 읽다가 덮어버린 기억이 난다. 이게 뭐람, 제대로 된 이야기가 없잖아, 하고 미련 없이 기억 저편으로 밀어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스타일의 이야기가 없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건 확실히 좁은 우물 안에 갇힌 채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의 오만한 편견이었다. 조금만 걸어 나오면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따뜻한 이야기의 세계에 안겨 있는 것이 마냥 편안했기 때문에 안주하길 원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가 있고, 세상을 모두 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야기는 인간이 구성한 특정한 세계일 뿐이고, 권선징악이라든가 해피엔딩 같은 것이라든가 선과 악으로 뚜렷하게 갈라진 인간 같은 것은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세상은 그것보다는 더 복잡하고 복합적이며 규정하기 힘든 곳이었다. 뚜렷한 이성으로 파악해 내기에는 불가해한 것들이, 다중적 의미를 지닌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렇게 느끼게 된 서사의 한계와 기존 질서에 대한 절망을 딛고 나아가게 된 세계는 온통 혼란으로 가득한 세상이었는데, 그것은 마치 내 정신세계와 비슷했다.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어느 순간에는 이걸 생각했다가 다음 순간에는 저걸 떠올리고는 키득거리고 또 이어지는 순간에는 어떤 기억을 끄집어내며 훌쩍거리곤 하는, 내 정신세계 말이다. 그걸 깨닫고 나서 읽게 된 커트 보니것의 『챔피언들의 아침식사』는 그 정신세계와 다르지 않았다. 길고어 트라우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드웨인 후버로 갔다가 그림도 그렸다가 트라우트가 쓴 책 속 이야기인 외계 행성 이야기로도 튀었다가 스쳐가는 인물처럼 보이는 운전사 이야기로도 회전해 간다. 게다가 기존 작가들과는 다르게 어떤 권위도 없이 아무 때나 툭툭 튀어나와서 자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중심인물들만 가지고 이야기를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러면서 작가는 대놓고 이렇게 말한다.
“남들이야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대신 질서에 혼돈을 부여할 것이고, 실은 이미 그렇게 한 것 같다.”(284)
인물들은 자신이 창조한 존재들이라는 전제를 두고, 미국 역사는 해적들의 역사라든가, 노예제의 역사와 흑인들의 모습이라든가, 현대인들은 화학 물질에 뇌가 망가졌다든가, 그래서 “미국인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은 어떤 식으로든 자살하는 일”이라든가, 트라우트의 아들 리오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베트콩이 되어버렸다든가, 세이크리드 미러클 동물의 복류가 산업폐기물로 오염되었다든가, 지구는 이제 석탄과 석유로 파괴된 행성이라든가, “모든 것의 평균치를 아주 높게 조작해서 그 행성에 사는 모두가 모든 면에서 열등감을 느끼게 만들어버린”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해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기계이며 환경파괴의 로봇이 되어버렸다는 말은 이 모든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만약 기존 서사의 흐름 속에서 저런 메시지들이 들어있었다면 우리는 톨스토이에게서 느끼듯 커트 보니것을 권위적이며 교조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가는 소설 안에서 같이 좌충우돌하면서 우리와 비슷하게 미쳐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인물들뿐 아니라 작가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읽다 보니 이 소설은 슬프면서도 웃기고, 재미있으면서도 가슴 아프다. 이미 1970년대에 2025년의 현실을 너무나도 잘 반영하고 있어서 더 그렇다. 그래서 작가가 말하는 결말이 마치 우리의 미래 같기도 해서 오싹하기도 했다.
엄청나게 잘 살지만 미쳐가던 폰티액 자동차 딜러인 드웨인과 땡전 한 푼 없는 소설가 길고어의 최후를 비교해 보는 것은 오싹하면서도 재미있다. 작품 속 작가로 등장하는 작가에 대해 아래처럼 대놓고 까면서, 좌충우돌하며 향했던 방향은 결국 예술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메시지다.
“나는 비어트리스 키즐러가 인생에는 주연과 조연과 중요한 디테일과 중요하지 않은 디테일이 있고 배워야 할 교훈과 통과해야 할 시험과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고 사람들이 믿도록 만들고자 다른 구식 이야기꾼들과 손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 그러다가 갑자기 동정심을 느끼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그토록 형편없이 행동하며 형편없는 결과를 낳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그들로서는 악의 없고 자연스러운 일임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야기책 안에서 창조된 인물처럼 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이 그토록 자주 서로를 총으로 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것은 짧은 이야기나 책을 끝낼 수 있는 편리한 문학적 정치였다.”(283)
길고어가 마지막에 외치는, “나를 다시 젊게 해줘, 나를 다시 젊게 해줘, 나를 다시 젊게 해줘!”는 예술을 다시 젊게 하라는 작가의 정언명령이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 챔피언들의 아침식사를 먹으며, 혹은 들이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