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으로 남은 순수한 사랑 이야기
2025년에 1800년대 초반에 쓰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 보니, 그것이 신에 대한 사랑이든 이성에 대한 사랑이든 순수함을 넘어 순진함마저 느껴진다. AI가 도래한 세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걱정을 하며 살아가는 시대를 살다 보니 주인공이 인식하는 세계가,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그 순간이 순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불순물도 끼어들지 않았던 그 세계의 사랑은 순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절대적 존재에 대한 사랑이 여전히 남아 있고, 나와 타인의 차이를 처음 인식하기 시작한 사랑은 무균실의 상태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화자가 처음에 던지는 질문은 “우리를 고독하고 쓸쓸하게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인데, 그에 대한 답은 나와 분리되어 있는 타인의 발견이다. 여기서 말하는 타인에는 가족은 포함되지 않은 범주라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타인과는 다른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절대자와 분리되어 나오면서 개인을 인식하게 되고, 동일시할 수 없는 분리된 세계를 알게 되면서 이제 막 ‘고독’을 발견하게 된, 근대인의 모습이다. 현대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는 타고난 세계가 개별화된 세계였다면 화자에게는 그런 세계가 이제 막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화자의 질문과 답은 우리가 떠나온 세계의 추억처럼 느껴진다.
계급 격차를 극복한 사랑이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시선으로 읽으면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현재의 우리가 계급 격차를 뛰어넘는 사랑을 하려고 한다면 재벌가의 자녀와 평범한 가정의 자녀가 만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데, 이미 그런 사랑은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주인공과 마리아가 어린 시절 함께 어울리던 것과는 다르게 재벌과 평민은 어릴 때부터 만날 일이 거의 없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만날 확률이 매우 드물다. 후작 부인의 목걸이 사건과 같은 일 또한 해프닝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동네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어놀던 시절에는 실시간으로 전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종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알 수 없었으므로 순수한 공동체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 자체도 분열되고 해체되고 있는 지금을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어떤 두 사람의 완전한 동일시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 안의 인격조차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된 자아가 서로를 물어 뜯기도 하는 시대라서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사랑이 전근대적인 형태라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그리고 예상하는 미래라는 것은, AI와의 사랑 같은 것이라서 좀 더 신랄한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이것은 과거의 사랑을 비웃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모습에 대한 냉정한 판단에 더 가깝다. 주인공이 마리아를 잃고 나서 망연자실해 있을 때, 의사가 해주는 충고와 같은 것을 우리가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그렇다. 오히려 자기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싶은 회의감이 더 드는 것은 자기 분열에 이미 익숙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마리아는 내 마음을 이 세상에 묶어두는 유일한 존재였다네. 이제 자네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삶을 짊어지고 가야 하네. 부질없는 슬픔에 빠져 헛된 나날을 보내지 말게. 이웃을 돕고, 그들을 사랑하도록 하게.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녀같이 아름다운 영혼을 알게 되고, 사랑할 수 있었음에 신께 감사드리게. 그녀를 잃은 것까지도 말이야.”(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