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선명한 꿈을 꾸고 싶다면
아주 잠깐이라도 심심할 틈이 없이 우리를 재미있게 해 줄 다양한 매체들이 주변에 널려있어서 혼자 있어도 고독할 시간을 주지 않으니 그저 신나기만 할 것 같은 세계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는 도대체 왜 이토록 우울한지, 그 이유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왔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원인을 알면 해결은 가능한가.
단정해서 알 수는 없지만 융의 자서전을 읽다 보니 그 문제를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전 생애에 걸쳐 인격의 비밀을 알고자 했던 한 사람의 기억을 함께 더듬어가다 보니, 우리에게 생겨난 결핍이 무엇이었는지 보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보고 듣는 것이 너무 많아서,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에 너무 기대어와서 융이 말한 대로,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451) 한 것이 아닐까. 융이 관심을 기울였던 연금술적 세계와 아프리카나 동양에서 발견한 원시적 세계는 우리가 너무 멀리 떠나오면 안 되는 세계가 아니었을까. 인간 이성과 개인의 발견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지만,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536)는 점에서 신화의 세계가 지겨워서 떨어져나온다는 것이, 한계를 알지 못하고 너무 멀리 분리되어서 개인이 소외된 것이 아닐까. 과학 기술이 이토록 인간을 안락하게 하는데, 정신과는 늘어만 가는 것은 그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융은 유럽의 문화가 꽃을 피우던 것과 봤고, 유럽 스스로가 야만으로 전락하는 것도 경험했다. 융의 말년은 당대 유럽의 시대적 문제와 한계를 인식하고 암울하게만 보이는 인간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방향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유럽 문화의 전성기를 살던 다른 지식인들이 유럽인의 야만적인 행태를 보며 절망에 빠졌던 것과는 다르게, 융은 인간 이성에 대한 과도한 맹신이 낳은 폐해라고 인식했고 유럽인의 오만함으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은 인류가 잊고 있던 원형적 세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지금 우리도 눈에 보이는 전쟁과 더불어 비가시적인 전쟁 또한 겪고 있는 중이다. 극도로 자본화된 세계에서 벌이고 있는 경제 전쟁은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숫자로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을 것이며 그 영향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비인간화를 가속화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선과 악의 기준조차도 모호한데, 둘이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가진 자는 선이고 가지지 못한 자는 쉽게 악이 된다는 사실과 그런 세계에서 우리가 인간성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사실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둘이 의식과 무의식에서 균형 있게 섞여 있어야 안정된 상태일 것이다. 융은 그 상태를 만다라라고 하는데, ‘오늘날 제기된 악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철저한 자기인식, 즉 자신의 전체성에 대한 최선의 인식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것처럼, 자신을 먼저 제대로 들여다볼 것을 권한다. 정확한 자기 인식이 전제된 자기 동일성이 확립된 상태가 만다라의 상태라고 보고 있다. 그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성과 과학이 중심인 세계에서 좀 떨어져 나와서 신화적 세계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때는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고 있는 이런저런 지위들 때문에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고집할 것이다. 아마도 ‘나의’ 재능이나 ‘나의’ 미모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572)
지금도 우리에게 끝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매체 속 의미에는 타인들의 삶을 전시하는 것, 사회적 경제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 통계를 가지고 위로부터 줄 세우는 것, 더 많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거짓 만족과 같은 것들이 무한하게 섞여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주 길을 잃고, 자신을 잃는다. 무한한 것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래서 고립되고 고독할 틈이 없을 것 같은데 오히려 우리는 무한대로 고독하다.
융이 말하는 대로 신화적 세계와의 연결이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사실 무한한 것과 관련된 감각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융이 살던 시대보다 많은 부분이 더 가속화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미 전통과 공동체는 남아있지 않고 신의 개념 또한 달라졌다.
하지만 우리가 “비밀로 가득 찬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다. 언제나 설명가능한 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것이 함께 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을 안도하게 하는 동시에 겸손하게 만든다. 인간 능력 바깥의 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바깥을 수용하고 포괄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런 상태라면 세상에서 나만으로 인정받는 것보다는 조화롭게 사는 쪽이 더 가치를 두게 될 것 같다. 때때로 느끼게 되는 개인의 무력함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다. 융도 끊임없이 자신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하던 사람이었다는 사실 또한 큰 위안이 된다.
* 메모하고 싶은 문장들
“환상에 관한 작업을 하던 바로 그 무렵, 물론 나는 ‘이승’에 발판이 필요했다. 그것은 가족이며 직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낯선 내면세계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대극으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었다. 가족과 직업은 내가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기반으로 남아있었고, 그것은 내가 실제로 현실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임을 증명했다.”(346)
“자신의 인식을 윤리적 의미로 바라보지 않는 자는 권력원리에 빠지게 된다.”(352)
“개신교나 유대교의 영역에서는 아버지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지배적이다. 이에 반해 연금술철학에서는 여성원리가 두드러져 남성의 그것과 동등한 역할을 했다. 연금술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상징의 하나는 물질의 변환이 완성되는 그릇이었다. 나의 심리학적 발견의 핵심도 이와 같은 내면의 변환과정, 즉 개성화였다.”(367)
“그 시대에 신적인 카이사르에 의해 구현된 로마제국의 막강한 권력은, 수없이 많은 개인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자주적인 삶의 방식과 정신적인 독립성을 빼앗긴 세계를 만들어냈다. 오늘날의 개인이나 문화공동체도 비슷한 위협, 즉 대중화의 위험에 처해있다. 그리하여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 재림의 가능성과 거기에 대한 희망이 이미 활발하게 논의되고 환상을 보았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는데, 그것은 구원을 기대하는 마음의 표현인 셈이다.”(382)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부정은 이미 심상치 않게 가까이 다가온 미래의 문제를 예언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 꿈은 인간세계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생각과 징후, 즉 피조물이 그의 창조주를 근소하지만 결정적으로 능가한다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다.”(395)
“부모로부터 아이들에게 넘겨진 비개인적인 카르마가 가족에게 존재한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나는 조상들에게 숙명적으로 던져졌으나 아직 해답을 얻지 못한 물음에 내가 대답해야 하며, 지나간 세대가 완성하지 못한 채 남긴 것을 내가 완성하거나 계승해야만 할 것같이 늘 여겨진다.”(417)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421)
“인간의 제의적 행위는 신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한 응답이며 반응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 이상의 것, 즉 적극적인 ‘실현’, 주술적 강요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이 신의 압도적인 작용에 충분히 응답할 수 있으며 반대로 신에게조차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 개인을 형이상학적 요소를 지닌 위업에까지 이르도록 고양하는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무의식적인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과 우리’라는 이러한 동등한 관계가 인디언들의 저 부러워할 만한 의젓함의 근거가 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참으로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452)
“여기서 의식의 우주적 의미가 더한층 분명해졌다. 연금술에서는 “자연이 불완전하게 둔 것을 예술이 완전하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인간인 내가 보이지 않게 창조행위를 하고 있는 그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로 완성되도록 해주었다.”(457)
“그런데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527)
“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좁은 한계에 매여 있도록 하며, 오직 이미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삶(이것 역시 조건부이긴 하지만)을 살도록 요구한다. 마치 사람들이 삶의 진정한 범위를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 의식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536)
“시공간의 상대성 때문에 무의식은 지각만을 처리하는 의식에 비해 더 나은 정보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후의 생에 대한 우리의 신화와 관련하여 꿈이 주는 약간의 암시나 이와 비슷한 무의식의 자발적인 발현을 통해 가르침을 받고 있다.”(558)
“서양인으로서는 정적이기만 한 세계의 무의미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세계의 의미를 전제해야 한다. 동양인은 이런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자신이 그 전제를 구현한다. 서양인이 세계의 의미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면, 동양인은 인간 속에서 의미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자신으로부터 세계나 존재를 벗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부처다.”(560)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은 내가 오로지 고심 끝에 인식하게 된 초개인적인 인생과제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조상이 이미 골똘히 생각해보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562)
“중독 대상이 알코올이든 아편이든 또는 이상주의든 그 어떤 형태의 중독이든 똑같이 모두 악에서 나온다. 우리는 선악의 대극에 더 이상 이끌려서는 안 된다.”(580)
“원형은 단순히 비활동적인 형태가 아니라 특수한 에너지를 갖추고 있으므로 그와 같은 진술의 동인으로 간주될 수 있고 그 진술의 주체로도 이해될 수 있다. 개인적인 인간이 그 진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이 그 개인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진술이 저지되거나 무시되면, 의사로서의 경험이나 마음에 관한 일반적인 상식이 보여주듯 정신적 결핍현상이 생긴다.”(616)
“사람은 자신이 어떤 면에서는 비밀로 가득 찬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는 마음속으로 예상되는 일뿐만 아니라 그 외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예기치 못한 일들과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일들이 바로 이 세계에 속하는 것들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삶은 온전해지는 것이다. 나에게 세계는 처음부터 무한히 크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