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다면
지금은 꽤 무던한 생활인이 되어버렸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상당히 예민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혼자 어두운 구석에 앉아 책을 읽거나 몽상에 잠겨 있던 적이 많았고, 잘 먹지 않았으며 자주 놀라고 몰래 훌쩍거리는 아이였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희뿌연 한 햇살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졌고 어쩌다 낮잠을 자다 깨어났을 때 사위가 어둠에 잠기려고 하면 서러워서 울기도 했다. 그런 우울의 정서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세상에 혼자 떨어진 고독감에 몸을 떠는 사람을 주변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런 감정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본 적도 없다. 이런 감정을 조금이라도 느껴봤던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읽으며 감정적 유대감을 느끼며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소설은 춤, 다리, 여우, 껍데기, 감옥이라는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춤은 프롤로그라서 소설을 열어주고 있고, 감옥은 에필로그로 모든 이야기를 닫는다. 화자인 ‘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어떤 섬 위에 있는 궁전으로 들어간 뒤 출구를 빠져나오기 위해 춤을 춘다. 출구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춤을 추는데, 문지기는 마치 거울 속에 있는 나처럼 함께 춤을 춘다. 어느 순간 나는 그 춤이 싸움이 아니라 끝없는 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치 운명의 굴레 안에 들어간 것처럼 벗어날 수 없는 춤을 추다 보면 나와 바깥은 하나가 되고 내 껍질은 찢어지고 영원한 무를 향해 간다. 그렇게 운명을 통과하고 나면 마지막 순간에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거라고” 말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화자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인간의 운명은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이 소설은 운명의 굴레 안에서 옴쭉달싹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어두운 구석에서 응시하고 있다. 인간이 가진 운명의 일부인 멜랑콜리아의 측면에서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의미를 포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은 빛으로 가득한 집이라고 해도 텅 비어 있는 의미이며, 고독하고 쓸쓸하다. 자의식이 막 생길 무렵의 아이가 화자인 ‘다리’에서는 밝은 집 안에 있지만 엄마가 부재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잘 생각해 보면,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려볼 때 언제나 부모의 자리는 비어 있다. 기억으로 재구성한 어린 시절은 아이가 바라본 사물, 집안 어딘가의 모습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련한 빛과 같은 것들이 더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압도적으로 긴 시간 동안의 몽상 속에서 자신과 세계를 인식하곤 한다. ‘다리’의 화자인 다섯 살짜리 아이도 부모가 보이지 않고 자신이 외로운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상상 속에서 나타난 다리를 통해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아빠와 백화점에 있는 엄마를 찾아간다. 세 번째로 옥상에 나타난 다리는 키가 자라야 오를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에서 보면, 그 다리는 아이가 다음 단계로 가는 다리이다.
마르셀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여우’에서는 최초의 상실을 경험한 운명을 보여준다. 마르셀이 잃어버리게 되는 이사벨은, 부모를 제외하고 어린아이가 처음 갖게 되는 애착의 대상을 상징한다. 그 대상은 동생일 수도, 토끼나 강아지, 고양이가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다. 타자를 향한 아가페적인 사랑, 순수하게 상대의 기쁨만을 바라는 사랑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과정은 조금 더 어두운 색채의 멜랑콜리아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이런 질문이 터져 나온다. “운명은 어떻게 눈처럼 내리는가?”(156) 우리는 이제 주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열다섯 살의 소년이 된 화자는 ‘껍데기’를 벗는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기도 하고 비밀스럽기도 하다. 나뉘어 있는 성별의 차이는 미스터리다.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것 같은 소녀를 보며 ‘만일 내가 여자라면 저렇게 생겼을 거야’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환상과 몽상 속에서 만난 소년 이반과 소녀 도라는 서로를 통해 자신들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하고 어른들의 비밀을 엿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제 운명의 무자비한 족쇄 또한 인식한다.
“이반의 손가락, 가슴, 입술, 속눈썹을 꼭 끼는 껍데기처럼 짓누르면서 이반을 옴짝달짝 못 하게 조이는 것은 단지 주변 세상만이 아니라 바로 탈출구가 없는 이야기, 냉혹하고 무자비하고 투시적이고 대칭적인 이야기였다. 호박석 속에 갇힌 씨앗처럼 공간과 시간, 이야기 속에, 특히 엄격하고 냉혹한 소년의 외로움 속에 소년의 삶이 영원히 사로잡혀 있었다.”(230)
주어진 삶에 대한 증오, 태어남에 대한 후회(이것이 과연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시간 속의 외로움 등은 이제 소년의 운명이 되었다. 그가 이제 성숙해지면서 체념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삶에서 함께 가야 하는 것은 운명이 눈처럼 내린다고 했던 시인의 석상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에필로그는 너무나 자명하게도 ‘감옥’이다. 운명의 굴레에 갇힌 우리들, 영문도 모르고 들어가게 된 그 감옥 속에 있으면서 어쩔 수 없이 말을 가지고 논다.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을 만들어낸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으니까, 세상은 내가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운명의 감옥에 갇힌 죄수는 그 감금 상태에 절망하고 분열한다. 세상의 무한함 속에 갇혀 있는 작은 운명 하나, 그 운명이 무한의 차원을 아무리 넓혀서 인식해도 끝은 존재하고, 그 속에서 돌고 돌다가 울부짖을 수밖에 없다. 운명은 멜랑콜리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주어진 운명은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작가는 이렇게 질문한다.
“이 이야기 전체에 한 명의 너를 가두어야 하는 이 감옥은 빈틈없고 무한한 것일까?”(314) 그렇다면 운명이 감옥인 것일까, 이야기가 감옥인 것인가. 유일무이한 너란 존재는 내가 만들어낸 것인데, 내 말로 만들어낸 너는 괜찮은 운명 안에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너를 만든 운명인가 혹은 네가 나를 만든 운명인가.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 한 운명을 가두지 않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야기는 역시 돌고 돈다.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멜랑콜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