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때마다 새로움과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소설
이 소설은 제목부터 야릇하다. “향성”이라는 단어는 소설의 제목으로는 낯설다는 생각이 든다. 뜻을 짐작하기보다는 반드시 국어사전을 찾아보고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할 것만 같다. ‘외부의 자극에 일정한 방향으로 향하는 성질’이라든가, ‘흥미나 관심이 어떤 방향으로 향하는 성질’과 같은 뜻을 찾아보고 나서도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면 어리둥절해진다.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방에서 솟아나는 듯했다. 약간 축축하고 미지근한 공기 속에서 피어나, 그들은 가만히 흘러 다녔다. 마치 벽들에서, 철책에 싸인 나무들에서, 벤치들에서, 더러운 보도들에서, 공원들에서 스며 나온 듯이.”하고 시작하는데 작가가 가리키는 대상이 무엇인지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해봐야 한다.
‘그들’이 향성을 가리키는 말인지, 작가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인지, 혹은 작가가 만든 인물들인지 헤아려보려고 더 읽어봐도 지시하는 대상은 명확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감정 같기도 하고 ‘그’나 ‘그녀’ 같기도 하고 어떤 가족 구성원 같기도 한 듯, 계속 섞여 들어간다. 말하고 있는 대상이 선명하지 않으니 마치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뿌연 안갯속을 더듬어가게 된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점은, 길이 보이지 않는데도 계속 걸어갈 수는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보통 누보로망 소설이라고 하면 읽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데 이 소설은 잘 읽힌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쉽고 간결한 문체가 읽어나가도록 만든다. 그렇게 읽다 보면 어딘가에서 본 듯한, 혹은 언젠가 겪은 것 같은 어떤 상황이 연상된다.
아이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문득 들여다보게 되는 쇼윈도 앞에서 넋을 잃게 된다든가, 취향과 지식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외면하고 싶었던 순간이라든가, 지식인이라고 생각했던 저명한 인사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때 기대와는 달리 너무나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사실은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던 때라든가 하는 것들이 각 장마다 포착되어 있다. 신기한 점은 작가가 포착한 순간들이 독자의 상태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짤막하게 구성된 24장은 끝까지 모두 이런 식이라서 마지막에 만나는 ‘그들’도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지만, 그래서 그 안에 모든 것을 넣어볼 수 있다. 무의식이라든가, 고정관념 혹은 전통, 관습이 될 수도 있을 테고, 혹은 무심결, 취향, 기존의 방식 등등을 대입해 보았는데,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람이 아니라면 대체로 대입이 가능했고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더 재미가 있었고 의미가 풍부해졌다.
그렇게 보면 소설 읽기에 독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 참여형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당대의 기존 소설의 형식에서 벗어난 것은 물론이고 확장에도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쓸 수 있는 천재적인 작가이기 때문에 기존의 작가들에 대한 당찬 비판도 가능했던 것이다. 23장에서 보면 발자크와 모파상, 플로베르 등에 대해 “밋밋하고 진부하고 개성이라곤 없”으며, “너무나 케케묵었고, 클리셰들”이라고 아주 대차게 까고 있다. 이런 소설을 당시에 출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일단 부러웠고, 이런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형식적 실험과 발전도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소설을 읽고 있다. 나탈리 사로트의 모험이 현재 우리에게는 그만한 파급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관습적으로 사고하려고 하고 기존의 취향을 고수하려고 하는 경향성에 대해 조금은 자극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서 아직도 낯선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