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탱고>

닫힌 원 안에서 춤추는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

by 초콜릿책방지기

소설은 후터키가 종소리를 들으며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미 무너진 교회에서 종소리가 들려올 리 없는데, 그 소리를 들으며 후터키는 “마치 시간이 움직임 없는 영원의 원 속에서 유희를 벌이고 혼돈의 와중에 귀신이 재주를 피우듯 기상천외한 망상을 진짜로 믿게 하려는 것” 같다고 느낀다. 황폐하고 버려진 마을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이제 악취 나는 진흙 길만 펼쳐져 있는 길을 걸으며 아무런 희망도 없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도 안다.


후터키는 그곳을 떠나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지만, 결국 떠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마을에 새로운 번영이 찾아오길 내심 기대하지만, 그 기대는 사실 실체가 아닌 종소리를 듣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을 북쪽 염전 지대에서 8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벌었던 품삯을 받아온 슈미트와 크라네르는 그 돈을 마을 사람들과 나누지 않고 자기들끼리 떠날 작정이고 그 사실을 알아챈 후터키는 격분하는데, 그 또한 돈을 나머지 사람들과 공정하게 나누자고 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돌아온다는 소문은 비록 그들이 사기꾼이라고 해도 일말의 희망이다. 아무것도 없는 암흑보다는 거짓이라도 희망이 있는 진창이 더 낫다는 것이다.


농장이 해체되면서 몰락했던 마을에 남은 사람 중 하나인 의사는, 그 모든 몰락과 소멸 앞에서 자신이 맞설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죽음과 소멸로 사라져 버린다고 해도 그의 기억과 기록만큼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 한 명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헐리치 교장은 죄책감을 외면하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의미를 지우고, 술을 마시며 잊어버리는 방법을 택한다. 사실 헐리치뿐 아니라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현실을 잊기 위한 방법으로 술에 취해 있는 편을 택한다.


이렇게 어둡고 우울하며 언제나 술에 취해 있는 것 같은 소설 속에 한 소녀 또한 등장한다. 소녀 에슈티케는 가족들에게 소외되어서, “문 가까이에 있으면서 어디 멀리 가 있”으라는 말을 들어야만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도 살 수 없는 나라”에서 살아야만 한다. 사실 아무리 지옥 같은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어린 생명이 살아난다 것은 언제나 소설 속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여겨졌는데, 여기 완전한 디스토피아처럼 보이는 이 마을에서는 소녀조차 살아남지 못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땅부터 하늘까지, 모든 면에서 혹독하게 희망은 전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 소녀의 죽음이다.


그러므로 소녀의 죽음 이후에 등장한 이리미아시의 연설은 거짓 희망이다. 그는 구원자처럼 등장했고 그의 연설로 인해 마을 사람들에게는 죄의식이 자라났지만 정작 이리미아시의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죽은 소녀의 환영을 보고 난 후에도 이리미아시는 공허와 절망 속에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만 확인할 뿐이다. 그들은 이미 지옥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신의 의미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리미아시의 말을 듣고 마을을 떠난 사람들에게 주어진 현실은 자신들이 떠나온 마을과 그리 다르지 않은 척박한 마을에서 보잘것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리미아시가 당국에 보고하는 마을 사람들의 면면에서 개별적인 인간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객관적(?) 현실만 남는다. 이리미아시의 보고서를 보고 있으면 차라리 작가적 관점으로 묘사하던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더 현실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즈음, 마지막으로 다시 의사가 등장한다.


의사는 종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서 “무언가 좋은 뜻을 담고 있고 나의 확실치 않은 능력에 어떤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임을 알고 마술적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다. 소설은 시작에서 말했던 것처럼 “시간이 움직임 없는 영원의 원 속에서 유희를 벌이고”, 의사의 글쓰기를 통해 원이 닫힌다. 이 원 안에서 영원히 돌고 도는 사탄탱고를 추는 마을 사람들이 남아있게 되고,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곳을 기억하는 이런 기록이다. 헝가리 집단 농장 체계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객관적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영원히 멈추지 않는 절망의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소설이 필요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