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아프리카의 색채가 들어간 매력적인 소설

by 초콜릿책방지기

세대가 바뀌어서 지금은 잘 보이지 않지만, 2000년대 이전만 해도 이 소설에 나오는 아버지인 유진 아치케와 같은 인물은 스테레오 타입이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었고,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물상이었다.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아버지를 매우 인간적으로 그려내면서 시대와 사회의 희생자로 보여준 작품들도 많았다. 그럴 수 있던 시대라 그런 이야기도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인물이 당연했던 시대가 지나고 나서 이 소설을 읽으니, 유진이라는 아버지상이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이 소설이 발표된 것이 2003년이었으니, 그 사이에 이 작가의 고향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하게 된다.


주인공 캄빌리의 아버지인 유진이 전형적인 인물로 보이는 것처럼 이 소설이 구태의연하게 흘러갔다면 식상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소설의 구도는 서사에 충실하고 잘 짜인 것이라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추임새처럼 들어간 이보어와 나이지리아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상이 충분히 새롭게 다가온다. 캄빌리 집에서의 생활은 지독히도 철저하게 전통을 버리고 서양식으로 변모하려는 유진의 방식이라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이페오마 고모네 집에 가 있던, 은수카의 시간은 그들의 방식이라서 눈여겨보게 된다.


은수카에 갔다 온 이후 캄빌리의 오빠인 자자와 캄빌리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났으니, 그 시간은 소설 속 인물들에게도 중요한 시간이다. 사춘기인 두 아이가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인 동시에, 지식인 고모 이페오마의 생활 방식을 배우고 할아버지인 파파은누쿠를 통해 전통 종교과 설화를 배우며 민족적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최초로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 수 있게 되었고, 아버지에 대한 저항은 모든 억압에 대한 시작이기도 하다. 독재 체제에 대한 인식과 일신교적 세계관의 폐쇄성에 대한 각성은 아버지를 딛고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소설의 앞과 뒤 모두 은수카의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머니가 방을 나가고 나서 침대에 누워 과거를, 오빠와 어머니와 내가 입술보다 마음으로 이야기할 때가 더 많았던 세월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은수카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것이 은수카에서 시작됐다. 이페오마 고모의 은수카 집 베란다 앞에 있는 작은 정원이 침묵을 밀어 내기 시작하면서.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27)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먹고살기도 어려운 사회에서 살면서, 아버지 유진이 밖에서도 폭력배였다면 캄빌리를 비롯한 가족들이 쉽게 증오했을 것이다. 그런데 유진은 마치 예수의 아버지 같아서, 정권에 대항하는 잡지를 후원하는 ‘정의로운’ 일을 하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자비로운’ 사람인 동시에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는 존재다. 또한 전통 종교와는 달리,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한 존재라는 신을 믿기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를 우상 숭배자로 취급하며 쉽게 무시한다. 서양 종교와 문화가 물밀 듯이 들어오던 시기에 한국 사회에서도 자주 보이던 인물이다.


이제 캄빌리와 자자인 자식 세대는 이식된 문화의 그늘에서 열등감에 신음할 것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길을 찾아서 걸어가야 할 것이므로 유진은 반드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 그 일을 가정폭력의 가장 큰 희생자였던 엄마가 스스로 했다는 것이 가장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여성 인물들이 모두 주체성을 갖게 된다. 이페오마 고모처럼 체제를 비판하고 자식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인물뿐 아니라 가장 수동적으로 보였던 엄마까지 자기 삶을 스스로 바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했던 세계와 인물을 보면서도 새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캄빌리가 아마디 신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도 어른으로 향하는 과정 중 하나인 것도 작가의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남성과 종교의 권위가 구원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캄빌리 스스로가 찾아갈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은, 그녀가 또다시 은수카로 가야겠다고 결심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곳에서 나이지리아의 정신과 희망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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