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재미와 대만의 역사를 모두 맛볼 수 있는 소설
이 소설의 화자는 소설가다. 소설가가 소설을 쓴다는 설정은 어쩐지 작가가 너무 쉬운 길을 가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먼저 생긴다. 더구나 자신의 이전 소설에 언급된 자전거에 대한 독자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는 설정도 태만해 보일 수 있다.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그런 설정을 보고 나서, 가늘게 뜬 눈으로 수틀리면 금방이라도 던져버릴 마음을 가지고 읽게 되는 이 소설은, 책장을 넘길수록 자세를 바로 하고 눈을 크게 뜨도록 만든다. 그렇게 쉼 없이 읽다 보면, 작가가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일부러 언급한다는 것은 작품 속에서 상상과 실제의 경계가 서로 파고든다는 의미와 조응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의미는 압바스의 여자 친구였던 애니의 답신에서도 드러나는데(사실은 사비나의 글이었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 소설인지 사실인지 알 수 없는 글”인 그 편지도 작가가 보여주는 소설의 세계와 일맥상통한다. 경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오래된 자전거들에 관한 세세한 기록들을 읽다 보면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작가는 친절하게도 정확한 문장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요즘은 이런 오래된 철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이것들이 곧 거리의 야사이며, 지금 내가 거두지 않으면 이내 다 사라져버릴 것이고 그것은 곧 그 시대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사라진다는 뜻이라고 샤오샤는 말했다.”(158)
작가가 고물 자전거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좁게는 자신의 가족사와 실종된 아버지의 이야기이지만, 수집한 자전거의 수가 늘어나듯 이야기는 증폭되고 확장되면서 대만의 역사 속에서 아픔을 겪으며 사라져갔던 사람들과 나비들과 코끼리에게까지 이어진다. 고물 자전거를 수집하고 복원해내는 일은 “시간에 대한 숭배”이면서 역사적 의미를 복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느라 바빠서, 혹은 정치적 견해 차이 때문에 말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시간과 용기를 가지고 이런 일을 할 사람은 사실 소설가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나 역사적 고증과 정치적 단죄와는 거리를 두고, 사건의 의미는 독자의 몫으로 던지며 담담하게 말하는 것은 문학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화자는 엄격하고 말이 없던 아버지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고, 압바스도 아버지 바쑤이의 존재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과거의 어떤 부분이 경직되어 있다는 의미다. 일본인 스즈코의 말처럼 전쟁은 회상할 만한 것이 없지만 전쟁을 겪은 세대의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전쟁 때 일밖에 없다. 그런 시절을 겪었던 아버지들이 그 이야기를 자식에게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침묵과 실종 속에서 사라져버린 그들이 남긴 유산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은 자식 세대의 몫이다. 그들이 고산족이든 본성인이든 외성인이든 역사적 아픔 앞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그 의미를 알고 난 사람에게는, 세상은 조금 다르게 보일 것이다.
“얼핏 보면 세상은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인 것 같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어제까지의 세상과 미세하게 다른 새로운 세상이라는 것을.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아주 작은 벌레도, 먼 항성에서 온 빛도, 유리 위 먼지도 모두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400)
소설의 시작에서 공명차(자전거)를 타고 살아남은 아이가 누구였는지는 마지막에서야 밝혀진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떠났던 화자는 이제 아버지의 자전거를 가지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온다. 마치 은륜처럼 시작과 끝이 돌고 돌아서, 삶의 시작이었던 어머니에게로 와서 끝이 난다. 그래서 많은 인물들과 나비와 나무와 코끼리와 일곱 개의 자전거가 등장하는 이 대장정의 소설은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고 묵직한 감동을 남기고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