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한 입, 달콤 쌉쌀한 한 줄의 문장
어쩌면 과하다고 할 만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가 하나 있는데, 바로 파티라는 장르다. 파티를 장르로 분류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 머리 아프게 논쟁할 생각은 없어서 설명을 덧붙이자면, 나에게 파티의 의미는 문학이나 영화를 분류하는 것처럼 하나의 장르적 의미를 갖고 있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혹은 성격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파티를 분류할 수 있을 텐데, 파티에 관해서는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두 다 좋아한다.
연말이 다가오면 파티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사실 나는, 파티에 대한 로망을 터무니없을 정도로 크게 가지고 있다. 파티라는 말만 들어도 심쿵하게 되고, 그 단어와 이미지에 사로잡혀서 설레게 된다. 내가 참석하는 것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파티라는 단어는 페스티벌과 같은 행사보다 훨씬 더 마음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언제부터 파티에 사로잡혔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릴 적 자그마한 문고판으로 읽었던 캐서린 맨스필드의 <원유회>로까지 가 닿는다. 소설의 내용은 분명히 씁쓸한 것이었지만, 나는 소설 전반부에 등장하는 가든파티에 대해 묘사에 사로잡혀서 마치 그 정원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상상을 꽤 오랫동안 했던 것 같다. 소설의 주제와 상관없이 원유회라는 단어가 풍기는 달콤한 인상과 서양미술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장면들의 따스함이 어느새 나에게 로망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 같다.
막상 파티에 가게 되었을 때 그것은 내가 오래도록 상상했던 것과는 아주 많이 달랐고,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실망하게 되었다. 그 뒤로 이어지던 다른 파티들도 모두 내 상상 속의 파티와 실제 파티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러 가는 것 같았다. 실망하는 것으로 마음을 접었으면 좋았을 텐데, 언제부턴가는 내가 직접 파티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파티를 즐겨온 파티 피플이 아닌 나는, 상상 속으로만 키워온 파티의 이미지를 제대로 구현해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술이 오르지 않으면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어색해지곤 했다.
역시 로망은 그저 로망으로만 남겨두는 것이 맞는 것인데, 연말이 돌아오면 여지없이 파티병이 도지게 된다. 주변에 파티를 하자고 물어보고, 이런저런 의견을 듣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려고 하면 또 자꾸만 부끄러워진다. 하고는 싶지만 그만큼의 양만큼 부끄러움도 크다.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나는 파티 피플은 아닌 것이다. 연말 파티하자고 벌써 소문은 냈는데, 이걸 어쩌나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