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라고

12월 29일 수요일

by 쓰는 사람

미국에 처음 와서 감기에 걸려 집에서 혼자 골골하고 있을 때 현승이 사다 준 약은 데이퀼 물약이었다. 미국에서 감기에 걸리면 무슨 약을 사 먹어야 하는지도 모를 때라 낯설고 신기하면서도 왜 하필 물약이지? 애 취급 당하고 있는건가? 라는 생각도 슬쩍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몇 차례 더 감기약을 사다 줄 일이 있을 때 마다 그의 선택은 늘 물약으로 된 데이퀼이었다. 이제는 가끔 감기약을 먹을 일이 있어도 왠지 알약으로 된 데이퀼을 먹으면 효과가 없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기도 한다.


주말 내내 몸살 오한 게다가 속쓰림까지 겹쳐 앓고 있을 때 그가 사다 준 약도 역시나 그 오렌지색 물 약이었다. 감기약의 원픽은 늘 판피린F였던 엄마도 겹쳐 지면서 좀 웃음이 났다. 그러고보니 엄마는 늘 판피린F를 주시면서 알약보다 물약이 몸에 더 빨리 흡수 되어서 효과가 빠르다고 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이루려 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일들이 줄줄이 생각나 마음만 조급해지고 자책하게 되던 12월이었다. 지금이라도 뭐라도 더 해 봐야겠어서 밤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있기도 했었다. 방학이 아니면 집중해서 논문 쓸 시간 없는데, 지금 열심히 해야 하는데, 라며 자꾸 나를 다그쳤다. 그런 나에게 몸이 보낸 신호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나를 다독이면서도 내심 며칠을 손해 본 것 같아 속이 영 쓰리긴 하지만, 그래도 스케줄에 제동이 걸린 덕에 무엇을 우선 순위로 해 나가야 할지 더 명확해졌다. 덕분에 이번 겨울 방학에 온전히 누워서 쉬기만 한 며칠도 생겼다. 새해를 맞이하기 전 필요한 시간이었다 생각하고, 이제 또 조금씩 해 나가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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