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는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선동과 프레임 속에서...
주말에 본《위키드: 포굿》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알파바와 글린다의 우정보다 더 깊게 다가온 지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한 사람을 ‘나쁜 마녀’로 만드는 사회의 방식, 그리고 그 뒤에 감춰진 군중 심리의 작동이었다.
누가 ‘나쁜 마녀’를 만드는가 — 위키드가 던진 군중 심리의 질문
영화 속 글린다는 처음에는 서툴지만 선하고, 허영심 많지만 미워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녀는 점점 ‘글린다 마법사’라는 '착한 마법사' 라는 이미지로 대중의 기대 속에 놓이게 된다.
예쁜 외모, 대중이 원하는 말, 모두가 좋아할 만한 말투.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 이미지가 자신을 보호해주고 때로는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알파바를 ‘사악한 마녀’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알파바를 ‘사악한 마녀’로 규정하는 프레임이 함께 만들어졌다.
권력과 결탁한 이미지 조작
군중의 욕망을 이용한 선동
어떤 사람을 ‘악’으로 만들어야만 자신의 ‘선’이 완성되는 구조
이것은 판타지 속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일상 곳곳에서 아주 익숙한 방식이다.
영화 속 시민들은 알파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녀가 무슨 선택을 했고,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그 상처와 분노의 출발점이 무엇인지 거의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너무 쉽게 말한다.
“악한 마녀가 나타났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들어준 이야기’다.
뉴스 한 줄, 누군가의 말 한마디, 편집된 정보 한 조각.
그것만으로 한 사람은 순식간에 ‘악한 사람’이 되기도, 혹은 ‘영웅’이 되기도 한다.
영화 속 마법사가 “대중은 진실을 원하지 않아. 그들은 믿고 싶은 것을 원해.”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문장이 마음을 오래 붙잡았다.
내가 일상에서 무언가를 판단할 때
그 판단은 과연 내가 직접 본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전달받은 이미지인지 돌아보게 했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피에로는
모두가 알파바를 두려워하고 비난하는 와중에도 그녀의 행동과 말,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한다.
조롱당하고 미움받던 알파바에게 단 한 사람, 피에로만은 묻는다.
“너는 왜 그런 선택을 했어?”
그 질문은 비난도, 단정도 아니다. 그저 성실하게 이해하려는 태도다.
모두가 손가락질할 때 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물어준다면 누군가의 삶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나는 그 장면에서 우리가 모두 조금은 피에로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키드: 포굿》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미리 만들어진 이미지를 사실로 받아들이는가?
군중이 향하는 방향에 의심 없이 발을 맞추고 있지는 않은가?
어떤 사람의 일부만 보고 전체라고 단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다.
눈앞의 이미지가 전부가 아니다.
진짜를 보려면,
그저 조금 더 질문해야 하고,
조금 더 시간을 들여 들여다봐야 하고,
조금 더 자신만의 판단을 할 용기가 필요하다.
피에로는 사람들의 말보다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더 신뢰했다.
그 태도는 거창하지 않지만, 지금 시대에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소문 대신 직접 듣기
다수의 판단보다 자신의 눈으로 보기
누군가의 낙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왜 그랬을까?’를 한 번 더 질문하기
이 작은 태도들이 모이면
누군가를 ‘나쁜 마녀’로 만드는 사회가
조금은 덜 잔인해지지 않을까.
우리는 누구나 어떤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존재한다.
그 시선이 따뜻하면 한 사람은 살아날 수 있고,
그 시선이 차갑고 가혹하면 한 사람은 쉽게 ‘마녀’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성실하게 보고,
조금 더 깊게 이해하고,
조금 더 천천히 판단해야 한다.
위키드는 마녀가 되는 과정보다 마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