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
대한민국 수영을 대표하는 스타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는가? 일단 박태환이 제일 먼저 생각날 것이고 윗세대는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젊은 세대는 황선우 정도가 아닐까. 그럼 남자가 아닌 여자 선수로 한정하면 누구일까? 최윤희라는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녀는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3개를 따냈고 4년 뒤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2개를 추가해 아시안 게임에서만 총 5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래봐야 세계 선수권이나 올림픽 메달은 없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80년대 아시아 수영은 메달은 고사하고 결승에도 오르기 힘들 정도로 세계 수준과의 격차가 컸다. 특히 한국은 아시아 내에서도 일본 중공에 비해 기량이 떨어지는 수영 후진국이었다.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박태환 이후 황금세대를 배출한 남자수영과 달리 여자 수영은 여전히 아시아권도 장벽이 높다. 최윤희 이후 몇몇 선수가 금메달을 따긴 했지만 그만한 족적을 남긴 선수는 없었다.
최윤희를 알게 된 건 한국에서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던 1986년으로 당시 나는 국민학교 6학년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언론에서는 최윤희 선수에 대한 보도가 여러 차례 나왔는데 뉴델리에서 불과 15살에 3관왕이 된 최윤희에 대한 관심은 클 수밖에 없었다. 자국에서 열리는 데다 수영에서 금메달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빼어난 외모도 적잖은 주목을 받았다. 텔레비전에서 그녀의 예쁘고 청순한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설명하기 힘든 설렘과 충동이 발화되었다. 바야흐로 12살 소년의 가슴에 거센 불꽃이 던져진 것이다.
최윤희가 출전하는 86 아시안 게임 배영 결승. 최윤희는 양팔을 휘저으며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물살을 거침없이 갈랐다. 아시아의 인어라는 별칭처럼 한 마리의 이름다운 물고기가 유영하는 듯 그녀의 스트로크는 우아함 그 자체였다. 일본 선수 두 명을 제치고 가장 먼저 터치 패드를 찍으며 금메달! 물 밖으로 나온 그녀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자 관중과 시청자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내 기쁨은 찰나였고 그녀의 균형 잡힌 몸매와 속이 비치는 야릇한 줄무늬 수영복을 보는 순간 야릇한 상상이 휘몰아쳤다. 아! 이것이 진정 어른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말인가!
최윤희는 배영에서만 두 개의 금메달을 땄고 국민 여동생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한국은 86년 아시안 게임에서 중공과 불과 1개 차이인 93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메달리스트가 그렇게 많았음에도 최윤희는 라면 소녀 임춘애와 함께 아시안 게임의 스타로 돋보였다. 한편 나는 교실에 앉아서도 최윤희, 아니 최윤희 누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반에 있는 여자애들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저 애들은 여자가 아니었다. 고작 지우개 따먹기나 고무줄놀이나 하고 앉아있는 이 꼬맹이들이 여자인가? 2차 성징도 안 와서 머리 긴 거 빼면 남자애랑 다를 바 없는 저들이 여자인가?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쁘다는 지연이도 별수 없구나. 하지만 최윤희는 다르다. 방직공장 다니는 아래 집 누나와도 다르고 파마머리 동네 아줌마와 야쿠르트 아줌마와도 다르다. 화장으로 떡칠한 텔레비전 속 연예인과도 다르다. 이제 막 봉우리가 핀 19살의 순결함과 아름다움에 더해진 강인한 육체의 조화. 나에게 최윤희는 완벽한 여자였다.
2년 뒤 88년 올림픽에도 출전하리라는 기대와 달리 최윤희는 아시안 게임 직후 은퇴를 선언했다. 그녀의 경기 모습을 더는 볼 수 없다는 현실이 슬펐지만 이후 최윤희는 예능과 CF 등에서 다양하게 활동하며 인생의 2막 역시 화려하게 걸어갔다. 워낙 이른 나이의 은퇴라 그래봐야 고작 20대 초반에 불과했다. 그 무렵 중학생이 된 나는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바로 최윤희와 결혼하는 것. 최윤희와는 7살 차이가 나지만 내가 대학에 입학하는 93년이면 그녀 나이 스물여섯. 아직 결혼하기 늦은 나이는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그녀 나이 서른. 당시 여자 나이 서른이면 노처녀 소리 듣는지라 이때까지 가는 건 위험하다. 무엇보다 그동안 다른 남자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나 역시 황당하고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꿈이라는 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자고로 남자는 꿈을 크게 가지라 하지 않았나.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다.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학에 진학해 삐까뻔쩍한 직장에 들어간다면 나에게도 그녀를 차지할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고등학교 진학 후 성적은 서울대 근처에도 못 갈 수준이었고 얼굴 곳곳에 분화구처럼 솟아난 여드름은 얼마 안 남은 자존감까지 추락시켰다. 최윤희와 결혼하려면 외모도 뛰어나야 할 텐데 어째 갈수록 더 못생겨지다니. 그리고 마침내 그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91년 여름, 최윤희 13살 연상 록그룹 백두산 보컬 유현상과 결혼!!! 둘의 결혼은 모든 언론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뜨거운 화제였다. 요즘으로 치면 전성기 김연아가 데프콘과 결혼하는 격이었다. 시발 저 산도둑같이 생긴 넘은 뭐야? 감히 내 미래의 신부 최윤희를 빼앗아가? 나는 며칠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책을 봐도 글자가 들어올 리 없어 야자를 째고 혼자 밤거리를 방황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니지. 어떻게 저런 남자랑 결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유현상에 대한 증오는 시간이 갈수록 최윤희에 대한 실망으로 바뀌면서 그녀에 대한 마음이 차츰 식어갔다. 결혼 프로젝트가 산산이 무너진 나는 다시 공부에 집중하면서 다친 마음을 회복해갔다. 최윤희에 대한 기사도 찾아보지 않고 그녀를 잊기 위해 노력했다. 이 결혼은 절대 오래 못 갈 거라는 사람들의 질시와 달리 유현상 최윤희 부부는 지금도 이혼하지 않고 잘 살고 있다. 돌이켜보면 유현상도 그렇게 도둑놈으로 무시당할 존재는 아니었는데 상대가 하필 최윤희라 전국민적 욕받이를 감수해야만 했다. 이후 최윤희의 행보는 관심을 끊어서 몰랐는데 문체부 차관까지 지낸 걸 보니 여전히 열심히 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각할수록 오그라들고 민망한 기억이지만 어쨌든 그녀는 처음 나에게 결혼을 꿈꾸게 만든 여자였다. 이제는 멋있었던 금메달리스트 수영 선수 최윤희로만 간직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