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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우리는 취했었지

토크쇼의 오십세주

by 카미유

2000년 전후에 태어난 소위 Z세대들은 2002 월드컵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 니들 2002 월드컵 아니? 아이고 모르면 말을 마라. 온 나라가 약이라도 맞은 거 마냥 축구뽕에 취해있었다.

꼰대들의 월드컵 부심에 대해 말하자면 하룻밤을 꼬박 새도 모자란다. 맞아 그 시절 우린 미쳤었지. 앞으로 한국에서 다시 월드컵이 열리고 혹여 우승을 한다 해도 2002년의 범국민적 광란은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당시 직장을 막 그만둔 나는 월드컵에 빠져있었고 그 중심에는 오십세주가 있었다.


젊은 세대들은 오십세주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천년대 초 유행했던 일종의 폭탄주였다. 백세주와 소주를 1:1로 섞는데 그간의 폭탄주가 다른 술을 섞는 데 반해 같은 소주끼리 결합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처음 오십세주를 가르쳐 준 사람은 성가대 후배 민수였다. 명색이 초등학교 교사라는 애가 만나기만 하면 맨날 술을 병 채로 들이부어 저놈 밑에서 배우는 초딩들은 술부터 떼고 학교를 졸업하지 않을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서울 외곽에 위치한 OO 성당 청년성가대는 내 20대 청춘을 바쳤고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성가대에 들어간 건 전적으로 부모님의 권유 혹은 압박이었다. 게임개발자가 되겠다고 휴학을 하긴 했는데 종일 컴퓨터 앞에서 게임만 하고 앉아있는 꼴을 지켜보는 게 못마땅했던 거다. 무릇 작가가 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되듯 게임개발자가 되기 위해선 게임을 많이 해야 한다는 무적의 논리 앞에서는 잔소리할 명분도 마땅치 않았다. 암만 봐도 게임개발은 뒷전이고 그냥 히키코모리 게임중독자일 뿐인데 말이다. 가뜩이나 사회성 떨어지는 아들이 저러고 자빠졌으니 어떻게든 밖에 내보낼 구실을 찾아야 했고 때마침 적당한 먹잇감이 들어왔다.

- 이번에 본당 청년성가대가 생긴다는데 거기 한번 나가볼래? 니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하잖아. 가면 젊은 여자애들도 많고.....


노래를 좋아하긴 하지만 뒤에 덧붙인 말이 직격타가 되었다. 젊은 여자애들도 많고....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자식으로서 이 정도 청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마침 성당도 가깝고 호기심에 한번 가보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물론 어렸을 때 세례를 받긴 했지만 독실한 부모님과 달리 오랜 냉담 상태라 신앙심 같은 게 있을 리는 만무했다. 결론적으로 코가 낀 건지 어떤 건지 성가대 원년 멤버로 5년 동안 부지런히 활동했다. 살면서 학교 회사 동아리 통틀어 이렇게 열심히 해 본 적이 없을 정도였는데 단장도 해 보고 성당 청년들과 교류도 왕성히 주고받는 말 그대로 인싸 행세를 했다. 이후 집이 수원으로 이사 가고 취업이 되면서 자연스레 성가대를 관두고 성당에 발길도 끊었다. 하지만 두 번째 직장에서 불미스러운 퇴사를 겪고 백수가 되었다. 그때가 바야흐로 2002 월드컵이 열리기 직전인 5월 중순이었다.


시간도 남아돌고 퇴사의 아픔도 치유할 겸 나는 다시 옛 놀이터인 그곳으로 갔다. 그렇다고 다시 청년 활동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저 사람들을 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내가 간 곳은 정작 성당이 아닌 술집 ‘토크쇼’ 였다. 기독교의 성지는 예루살렘이고 이슬람의 성지는 메카와 메디나라면 OO 성당 청년들의 성지는 토크쇼였다. 테이블이 6~7개에 불과한 작은 술집이지만 성당에서 코앞에 있는 데다 인근에 다른 술집도 없어 사실상 독점이었다. 가게 주인 역시 이곳 신자였고 토크쇼는 본당 청년들이 없으면 운영이 안 될 정도로 늘 바글바글했다. 월드컵 개막 후 나는 거의 일주일에 서너번씩 토크쇼로 출근했다. 그곳에서 성가대 사람들을 보거나 못 만나면 다른 단체 술자리에 자연스레 합석했다.

- 형 이렇게 자주 올 거면 그냥 성가대 다시 들어와요.

- 야 너는 토크쇼가 직장이냐? 어떻게 올 때마다 여기서 보냐?

뭐 그때는 장차 백수 생활이 길어질 줄 몰랐다. 월드컵이나 보면서 한 두달 쉬다 보면 다시 취업할 줄 알았으니까.

예나 지금이나 민수는 토크쇼의 단골이었고 그와의 술자리는 잦았다.

- 형 오십세주 드세요. 내가 잘 말아드릴게.

그는 백세주와 참이슬을 한 병씩 시켜 빈 맥주잔에 적당히 섞은 뒤 내밀었다. 이 새끼가 시작부터 폭탄주를 먹여? 주량이 약한 편은 아니지만 음주를 좋아하진 않았다. 남들은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지만 되려 취하기 싫어 안 마시는 편에 가깝다. 특히 취기가 빨리 올라오는 폭탄주는 극혐. 그러나 입가에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두 술의 조합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분명 소주 맛인데 어딘가 오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이 느낌은 뭘까.

- 잘 드시네요. 그럼 한 잔 더?

민수는 오십세주 전도사답게 성가대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청년단체 사람들까지 불러모아 부지런히 오십세주를 말아댔다.

한국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토크쇼는 붉은 티를 입은 본당 청년들로 가득 찼다. 주인은 외부손님은 아예 받지 않고 예약한 청년단체 사람들만 출입시켰다. 이들은 함께 대~한민국! 을 외치며 대표팀을 한목소리로 응원했다. 한국이 승리한 날에는 철야로 열어두고 밤새 술파티를 벌였다. 토크쇼의 VIP 고객인 내가 당연히 빠질 수 없었다. 한국 경기가 열리지 않는 날에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오십세주를 제조해 마셨다. 취할 만큼 마시지 않겠다는 개똥 같은 신조는 오십세주 앞에서 태풍에 넘어간 가로수처럼 무너졌다. 마시고 마시고 계속 마시고. 월드컵이 열리는 6월 내내 몸은 오십세주에 절어있었다. 과거에도 속상한 일이 있을 때 간혹 술의 힘을 빌리곤 했지만 일시적이었다. 어차피 술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다음 날 맨정신에 밀려오는 찝찝함만 남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땐 왜 술이 그토록 맛있었을까? 결국엔 관계였다. 애초에 사람들과 어울리기 껄끄러워하는 성향의 나에게 이 시기는 이례적이었다. 나이 성별 직업을 초월해 많은 이들과 술을 마시며 부족했던 온기를 채웠고 월드컵은 때마침 불쏘시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오십세주의 힘을 빌어 부끄럽게 관둔 퇴사의 기억도 희석해 나갔다. 아무리 내향적인 사람도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행복을 느낀다는 건 인지상정이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환희의 순간을 공유했다는 건 얼마나 축복인가. 한국 경기가 열릴 때마다 토크쇼가 떠나갈 정도로 열광하던 청년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 짧은 행복의 기억마저 부재했다면 앞으로 닥칠 어둠의 터널에서 더 메마른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요 몇 년 술과 너무 멀어졌구나. 저랑 오십세주 같이 마실 분 어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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