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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은 잊었어도

학교 앞 카레 덮밥

by 카미유

새 직장을 구한 그해 대학 동창 민재를 종로에서 만났다. 학창시절 가깝게 지냈지만 졸업 후 각자 녹녹찮은 시간을 보낸 터라 의식적으로 만남을 피해왔는데 이젠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5년 만에 얼굴을 보았다. 모처럼 만난 동창 사이가 대부분 그렇듯 추억팔이 대화가 핵심을 차지했다. 학창시절 둘 다 아웃사이더 축에 속해 특별한 사건 사고가 많지 않았지만 아웃사이더들도 나름의 이야기 보따리는 남아있게 마련이다.


- 너 조경과 락희 알지?

- 당연하지. 니가 걔 좋아했잖아. 종강 때 편지도 줬는데 차였다며.

- 그 락희 옆에 늘 붙어 다니던 애 있었잖아. 덮밥집에서 알바했고.

- 그런 애가 있었나? 기억이 잘....

- 성훈이랑 우리 셋이 자주 가던 학교 근처 덮밥집은 기억나? 우리끼리 걔 보고 덮밥 덮밥 그랬는데.

- 아 생각이 나는 것도 같네. 맞아 덮밥집 있었지.

- 혹시 그 애 이름이 뭔지 알아?

- 나야 모르지. 근데 그건 왜 묻냐?


묻고 나니 뭔가 뻘쭘했다. 나조차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데 민재가 어떻게 알겠는가. 졸업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같은 과 동기 이름도 몇몇은 가물가물한데 다른 과 여학생 이름을 기억 못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녀와 알고 지낸 건 사실상 한 학기뿐이었고 특별히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다. 물론 그녀의 절친인 락희를 짝사랑했던 내 입장에서야 마냥 소홀할 순 없는 사람이지만 민재야 같이 덮밥집을 다닌 거 외에는 의미부여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다만 의문인 건 그녀의 이름이 시간이 지나면서 까먹은 게 아니라 마치 처음부터 이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거다. 당연히 그녀도 이름이 있을 테니 그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다. 우리끼리야 덮밥이라는 장난스런 호칭을 썼지만 초등학생도 아니고 여학생 앞에서 음식 이름으로 놀릴 만큼 경우가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나에게 그녀는 뭐랄까, 그냥 락희와 붙어있는 그림자 같았다.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게 되면 오직 그 사람만 빛나고 나머지는 배경으로 전락 되기 마련이다. 캠퍼스에서 락희를 볼 때마다 그녀는 거의 옆에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 클리셰에서 종종 묘사되는 예쁜 여주인공과 함께 다니는 수다스럽고 못생긴 친구는 아니었다. 말수도 많지 않고 외모적인 특이점도 없었다. 락희의 경우 30년이 지났어도 당시 쓰던 안경테 색깔과 도자기 같은 피부에 박힌 점의 위치까지 세세이 알고 있지만 그녀에게는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대략적인 얼굴은 그려낼 수 있지만 어떤 옷을 주로 입었고 어떤 매력이 있었는지 떠올리기 쉽지 않았다. 덮밥집 알바를 안 했더라면 기억 상자 속을 탈탈 털어도 나오는 건 부스러기 몇 줌밖에 없었을 것이다.


1학년 2학기 가을. 나는 절친 두 명과 함께 그녀가 일하는 덮밥집에 자주 갔다. 학교 근처 이 덮밥집은 가성비 좋고 맛도 괜찮아 직전 학기에도 가끔 들르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알바를 시작하면서부터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방문했는데 이날은 대부분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었다. 그 이면에는 그녀를 통해 락희의 정보를 조금이라도 캐낼 수 있을까 하는 의도 역시 숨어있었다. 가게에는 몇 가지 종류의 덮밥을 팔았는데 나는 거의 카레 덮밥만 먹었다. 카레라면 일주일 내내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극호 음식인데다 요즘 카레처럼 첨가물이 많지 않고 기본 재료로만 구성된 깔끔함이 입맛에 맞았다. 어느 때부터 굳이 얘기를 안 해도 넌 카레? 라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여느 가게처럼 사장이 직접 음식을 만들고 그녀는 서빙과 캐셔 역할을 맡았다.


락희와 있을 때와 달리 덮밥집에서 그녀는 수줍고 조용하지만은 않았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양쪽 학과 야구팀 실력을 논쟁하고 연예인 평가도 하면서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었다. 너희들이 자꾸 오면 바쁘기만 하지 시급이 오르는 것도 아니라며 핀잔을 줘도 은근 우리의 방문을 즐기는 눈치였다. 무엇보다 내가 제 친구를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오히려 락희에 대한 내 질문에 꽤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 락희 남자친구 아직 없어. 1학기 때 단체 미팅은 몇 번 했는데 재미없는지 이번 학기는 안 하더라. 우리 과에도 락희 좋아하는 애가 하나 있긴 한데 별로 맘에 안 드나 봐.

대화의 총량만 놓고 보자면 락희보다 그녀와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니 주고받았다는 표현보다 묻고 답하는 Q&A 방식에 가깝다고나 할까.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고 친구 얘기만 나오면 눈동자에서 광채가 솟는 이 철없는 남학생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녀는 학기 내내 3개월 정도 일하고 기말고사 직전 가게를 그만두었다. 마지막 방문 때까지도 나는 락희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혹은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추측과 상상을 가미해 던져주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그 정보들이 딱히 효과를 본 건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말문이 막히고 무력해지는 경험은 누구나 있지 않은가. 나는 락희에게 진심이라 믿는 마음을 고백했지만 거절의 쓴맛을 봤고 이로 말미암아 다음 학기부터 조경과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락희를 볼 일이 없으니 당연히 그녀 역시 볼 일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낭만적인 대학 생활이라 할 만한 시기는 그때가 정점이었다. 맘에 맞는 친구도 생겼고 짝사랑의 진통도 겪었고 성적은 바닥이지만 학교 가는 길이 늘 즐거웠으니 말이다. 락희는 성인이 된 후 처음 느낀 감정, 사실상 첫사랑이라 봐도 무방하다. 누군가 내 첫사랑에 대해 물어본다면 락희가 얼마나 예뻤고 스무 살 새내기의 마음을 어떻게 황산처럼 녹였는지 온갖 노스탤지어를 가미해 주절댔을 게 뻔하다. 하지만 이 첫사랑을 풍성하게 만들어준 건 바로 그녀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락희의 눈부신 외피만을 간직했을 것이다. 그녀의 입을 통해 뼈와 가죽뿐이던 첫사랑에 지방과 근육이 붙고 혈관이 이어져 하나의 완성품이 되었다.


그녀는 결코 락희라는 빛이 있어야 존재하는 그림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떨림의 연속이었던 첫사랑만큼이나 카레 덮밥을 앞에 두고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대화 역시 청춘의 반짝이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덮밥집에서의 그녀는 캠퍼스에서 보던 무채색이 아닌 천연색이었다. 때론 보이는 것보다 감춰져 있는, 기억하는 것보다 잊혀져 버린 수많은 그 무엇들이 우리 삶에 소리 없이 스며들어 의미와 가치를 일깨우곤 한다. 그녀의 이름은 지워지고 덮밥이라는 별명만 남았지만 내 기억 상자에서 떠나보내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그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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