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어탕 한 그릇
추어탕 좋아하십니까? 집에서 몇십 걸음만 나가면 추어탕 집이 나오는데 입맛이 없거나 찬거리가 떨어졌을 때 종종 한 그릇씩 먹고 온다. 추어탕을 처음 접한 건 10살 남짓이었는데 거부감없이 잘 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린 맘에 자기도 엄연한 생명이라며 냄비 속에서 팔딱대는 미꾸라지의 몸부림이 짐짓 징그럽고 불쌍하기도 했지만 그건 잠시에 불과했다. 미꾸라지의 형체가 진한 국물 속으로 갈려 나가 자취를 감추게 되면 그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앞에는 맛있는 추어탕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추어탕에 대한 애정이 배가된 건 아마도 2003년 그해 겨울 이후였던 것 같다.
서른 살의 나는 수원에 있는 5평짜리 원룸 빌라에서 자취 중이었다. 2002년 첫 직장 퇴사 후 백수 생활에 돌입한 지도 꽤 지난 터라 수중에 남아있는 돈은 끼니만 겨우 해결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낮에는 아버지의 제안으로 애견간호 아카데미를 다녔고 밤에는 남몰래 드라마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썼다. 하지만 소위 말해 돈을 버는 생산적인 활동은 부재했고 빈곤한 생활이 지속 되었다. 취업이 안 되면 알바라도 해야 할 상황인데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 집자면 하지 못했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당히 무너져내린 상태라 적극적으로 뭔가를 할만한 에너지를 생성할 수 없는 상태였다. 혹자는 신체 멀쩡하고 나이도 아직 젊은데 왜 일할 생각은 안 하고 황혼기 노인네처럼 방에서 웅크리고 있나 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신체도 멀쩡하진 않았다. 특별히 아픈 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살이 꾸준히 빠져 체중은 50킬로 밑으로 떨어졌고 탈모도 갈수록 심해져 탈모약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부모님이랑 살 때는 강제로 식사를 챙겨 먹었지만 두 분이 여주의 전원주택으로 떠난 뒤론 불규칙한 식사가 반복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울과 무력감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인간관계 속에서 주변 사람들조차 만나지 않아 고립감은 깊어지고 반복되는 실패의 경험 속에서 자신감은 지하 깊이 파고 들어갔다. 애견간호 아카데미는 마지못해 건성으로 다녔고 드라마 공모는 모두 낙방했다.
어느 날 자취방을 찾아온 아버지는 심상찮은 방 상태를 감지했는지 강제로 차에 태워 인근 마트로 향했다.
방 꼬라지가 그게 뭐꼬. 필요한 거 있음 다 담아라.
나는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의 쌀부터 시작해 온갖 식재료와 간식들을 닥치는 대로 카트에 쓸어 담았다. 쫄쫄 굶던 방 안 냉장고는 밀어닥친 폭식으로 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였다.
- 니 돈은 있나?
- 쓸 만큼 있어요. 안 줘도 됩니다.
거짓말이었다. 통장 잔고는 진작에 털어냈고 형이 간간이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는데 적어도 아버지 앞에서 돈 달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그날 냉장고를 넉넉히 채워놓은 덕에 한동안 먹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그 음식들이 내 전 재산인 양 조금씩 아껴 먹으며 하루하루 지냈다.
문제는 아껴도 너무 아꼈다는 점이다. 그렇게 찔끔찔끔 먹다 보니 유통기한이 지난 식재료와 반찬들이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버리지 않고 계속 먹었다. 유통기한은 말 그대로 유통되는 기한일뿐 날짜가 좀 지났다고 해서 먹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먹어도 탈이 나지 않으니 당연히 버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밤중에 배가 찢어질 듯 아프고 토기가 올라왔다. 화장실에서 그날 먹은 것들을 모조리 게워 냈는데도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방안을 데굴데굴 구르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택시를 타고 근처 병원 응급실로 갔다. 의사는 식중독 같다며 오늘 뭘 먹었는지 말해보라 했다. 특별한 건 없었다. 평소처럼 냉장고 안의 음식들을 먹었을 뿐이니. 다만 유통기한 지난 음식들이 너무 많아 식중독의 직접적 원인이 된 물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괜스레 서글펐다. 병원에서 링겔을 한 병 맞고 흐느적거리는 몸을 끌고 방 안에 나부라졌다.
다음 날 아침 고통이 잦아들긴 했어도 음식은 여전히 섭취할 수 없어 약과 물로만 버텼다. 일단 냉장고 안의 음식부터 정리했다. 너무 오래되고 한눈에 봐도 상한 것들은 다 버리고 유통기한이 남았거나 상태가 괜찮은 것들만 남겨두었다. 저녁 무렵 속이 안정되어가자 급격한 허기가 찾아왔다. 이젠 뭘 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밖으로 나갔다. 어둠이 내린 길거리와 골목 사이를 천천히 걷던 중 OO 추어탕 간판이 보였다. 여기에 추어탕 집이 있었던가. 외식을 일절 안 하다 보니 집 근처에 어떤 식당이 있는지도 몰랐다. 추어탕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말라가던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맞아, 나 추어탕 좋아했지. 생각해보면 비싸지도 않은 추어탕 한 그릇을 왜 여태 먹지 못했을까.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추어탕 하나 주세요! 를 외쳤다.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추어탕이 나왔고 산초와 들깨를 넉넉히 뿌린 뒤 엉망진창이 된 뱃속으로 뜨거운 밥과 국물을 내려보냈다. 죽어가던 몸에 맑은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식당을 나와 모처럼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추운 겨울밤에도 꽤 많은 이들이 호수 주위를 걷거나 달리며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식중독의 명확한 원인을 밝혀내진 못했지만 이번 일은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몸이 보내는 경고장이었다. 불필요한 자존심이야말로 나를 갉아먹고 있는 독성 물질인 것이다. 그날 밤은 중간에 깨지도 않고 아침 10시까지 기분 좋게 늦잠을 잤다. 아점을 먹고 아버지에게 돈이 없다고 전화하자 아버지는 별말 없이 계좌에 돈을 쏘아보냈다. 그리고 친했던 선배 형에게 연락해
- 형 저 밥 한번 사주세요.
- 야 왠일이냐? 니가 먼저 전화를 하고. 그동안 잘 지냈어? 오늘은 안 되고 내일 6시 반까지 회사 앞으로 나와라. 형 회사 어딘지 알지?
삶이란 무릇 혼자 걸어가는 거지만 반대로 혼자 갈 수 없는 여정이기도 하다. 세상은 당신의 생각처럼 마냥 인색하지만은 않고 가식 없는 측은지심을 가진 이들도 많다. 정말 힘들 때는 목소리가 다하기 전에 힘들다고 외치는 게 스스로를 지키는 길이다. 설령 값싼 동정일지라도 당장에 힘이 된다면 손을 내밀어야 한다. 최소한의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딛고 일어설 용기가 생기니 말이다. 이후 나는 1년의 방황기를 더 거쳤지만 망가졌던 몸과 마음은 천천히 회복되었다. 그날 먹었던 한 그릇의 추어탕은 벼랑 앞에서 멈칫거리던 나에게 앞으로 한 발을 내딛게 해준 은인 같은 음식이자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