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지막 학력고사 보던 날

눌러 담은 찰밥 도시락

by 카미유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둔 연말. 아버지와 함께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대입학력고사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아버지는 다 읽은 조간신문을 나에게 건넨 후 잠이 들었다. 며칠 전 대선에서 승리한 김영삼의 당선 기사가 지면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 영샘이(할머니는 김영삼을 영샘이라고 불렀다)가 인자 대통령 하네!

그가 대통령이 됐다고 해서 천 원짜리 한 장 떨어질 리 없음에도 할머니는 같은 경상도 사람이 당선됐다는 이유만으로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선지원 후시험으로 치러지는 마지막 학력고사. 지원 대학의 예비소집을 마친 뒤 시험 전날 순화동에 사는 이모할머니 집에서 묵기로 했다. 이모할머니 내외는 부산에서 상경한 부자를 호들갑스레 맞이했고 우리는 한쪽 방에 짐을 풀었다. 가끔 친척들 모임에서 뵙긴 했지만 사실 두 분은 서울과 부산의 거리만큼이나 썩 친근한 관계는 아니었다. 이모할머니는 누가 할머니 동생 아니랄까 봐 말이 많고 호탕했다.

- 그 쪼매나던 게 벌써 대학생 되나? 세월 빠르다 빨라.

저녁을 먹은 뒤 요약 노트를 펼쳤지만 몇 페이지 읽다 도로 집어넣었다. 일찍 일어나야 하니 얼른 자라며 10시도 되지 않아 불을 껐지만 당연히 잠이 올 리 없었다.

- 평소처럼만 하면 된다. 우야겠노, 떨어지면 재수해야지.

평소처럼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버지도 알 테지만 큰 시험을 앞둔 아들에게 해줄 말이 그 이상 남아있지는 않아 보였다. 재수를 하면 고3 시절을 한 번 더 겪는 건데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아버지, 저는 절대로 재수 안 합니다. 이번에 꼭 붙을 겁니다. 직전 모의고사 점수만 놓고 보면 합격권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바뀌는 입시제도의 부담 때문에 수험생들은 최소 10점에서 많게는 30점 이상 안전하향 지원이 대세였다. 내가 합격할 수 있을까.


밤새 좌우로 뒤척이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일찍 눈을 떴다. 컴컴한 거실 너머 불 켜진 부엌으로 가니 이모할머니 내외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늘 수험장에서 내가 먹을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었다.

- 와 이래 일찍 일어났노? 좀만 더 자거라. 깨워주꾸마.

- 누워도 잠이 안 와서요.

- 니 찰밥 먹재? 찰밥이 소화가 잘 된다드라.

이모할머니의 분주한 손과 달리 이모할아버지는 뒷짐 지고 선 채 잔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 소세지 더 담아라. 멸치는 빼야지. 다른 거 못 넣는다.

- 아, 영감쟁이 시끄러버라. 당신은 좀 들어가 있으소.

- 이모부는 들어가 계세요. OO 이는 아무거나 다 잘 먹습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재차 말했지만 그는 요지부동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반찬과 국을 모두 담은 이모할머니가 갓 지은 찰밥을 도시락 밥통에 넣던 중 갑자기 버럭 소리가 났다.

- 밥을 그래 눌러 담으면 우짜노!

- 뭔 소리요. 많이 묵어야 힘을 쓰지.

- 아따 이놈의 할마시가 뭘 모르네. 이래 담으면 맛도 없고 시험보다 배탈 나면 우짤라고!

- 배탈이 왜 나요! 잔소리 좀 그만하소.

이모할머니는 본인의 생각을 밀어붙혀 밥을 눌러 담았지만 막상 뚜껑을 닫고 보니 영 신경이 쓰였는지

- 묵다가 많다 싶으면 남기거라. 절대 억지로 묵지 말고. 알았나?


해가 뜨기엔 아직 이른 새벽. 아버지와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명륜동으로 향했다. 서울 날씨가 춥고 맵다길래 내복에다 옷을 겹겹이 껴입어 몸에서 땀이 날 지경이었다. 지원한 대학 정문 앞에서 아버지는 보온 도시락이 든 백팩을 건네며 여기서 기다릴 테니 시험 잘 보고 오라며 어깨를 만져주었다. 고사장으로 가는 길은 줄곧 경사진 오르막이었다. 길 양편으로 동문 고교 선배들이 요란한 장단으로 후배들의 합격을 응원하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 학교는 없었다. 어쩌면 전교생 통틀어 이곳으로 시험을 치러 온 수험생은 나 혼자 일수도.

시험이 치러지는 대학 본관은 웅장한 외관과 달리 내부는 벽에서 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낡고 어두웠다. 어차피 합격해도 여기서 수업을 들을 리는 없겠지만 첫인상은 영 달갑지 않았다.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1교시. 국어는 평소 큰 기복이 없는 과목이라 그럭저럭 무난히 통과. 2교시 수학은 배점이 가장 높고 자신 있는 과목이었는데 예상보다 문제가 쉬워 만점까지도 기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내가 쉬우면 남도 쉬운 법이지만 수학의 선전으로 합격의 7부 능선은 넘었다고 생각했다.

2교시가 끝난 점심시간. 다들 뒤쪽에 모아놓은 가방을 가져와 도시락을 먹었다. 수험장을 가득 채운 수십 명의 얼굴들은 침묵 속에 각자 자리에서 수저를 입속으로 가져갔다.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자일 수밖에 없는 현실. 이곳의 누군가는 몇 달 뒤 캠퍼스에서 재회하겠지만 나머지 모든 이들은 이 어두운 수험장이 마지막 모습일 것이다. 도시락 뚜껑을 열고 첫 수저를 떴을 때 찰밥의 온기는 느긋이 남아있었다. 나는 이모할머니가 눌러 담은 찰밥을 조금씩 천천히 국과 함께 밀어 넣었다. 군데군데 밤, 팥, 수수까지 첨가된 윤기 나는 밥. 앞선 결과가 나쁘지 않아 긴장이 풀려가던 몸에 따뜻한 밥까지 들어가니 몸은 절로 이완되고 머릿속도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많으면 남기라는 그녀의 말과 달리 바닥까지 찰밥을 싹싹 비웠고 화장실에 갔다 온 뒤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부첬다. 앞선 시험을 못 본 듯한 몇몇 애들의 표정은 울 것 같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3교시 영어는 사실상 당락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반타작만 해도 다행이라 할 정도로 제일 취약 과목이라 여기서 몇 점을 받느냐가 결정타였다. 60점 만점에 40점 이상만 받으면 합격 안정권이라 판단했는데 다행히 특별히 어렵지 않아 느낌상 40점은 넘길 것 같았다. 마지막 4교시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마무리한 뒤 가방을 메고 수험장을 나왔다.


정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학부모 무리에서 금세 아버지를 찾아냈다. 오십도 안 된 나이에 이마가 벗겨진 아버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 시험 어땠노? 붙을 거 같나?

- 잘 본거 같아요. 문제가 별로 안 어려워서.

- 고생했다. 뭐 먹고 싶노? 저쪽 길가가 대학로라 맛있는 집 많다더라.

- 아무거나 괜찮아요. 점심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배도 별로 안 고픕니다.

아버지는 쏟아져 나온 대학로 인파 사이로 여기저기 기웃대더니 결국 조명이 화려한 중국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평균 20점 이상이 올랐다는 마지막 학력고사 관문을 뚫고 며칠 뒤 합격 소식을 받았다. 몇 등으로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1등이든 꼴찌든 붙으면 그만 아닌가. 부산 집에서 합격의 여유를 누리고 있던 중 이모할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 니 학교 붙었다매? 아이고 잘했다. 내는 딱 붙을 줄 알았다.

- 고맙습니다 할머니.

몇 년 전 이모할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이제 두 분 내외는 영원히 만날 수가 없다. 그때 그 집에 묵지 않았어도 찰밥 도시락을 먹지 않았어도 어차피 난 시험에 합격했을 것이다. 하루에도 세 번씩 먹는 게 밥인데 그깟 도시락이 뭐 별거냐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날 아침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면 얘기는 다를 수 있다. 이른 새벽 수험생 손자를 위해 평소 먹지 않던 음식을 만들어 담는 아내와 딱 봐도 평소 부엌에는 출입조차 안 했을 고지식한 남편이 도시락 하나를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는 이 노부부의 광경을 봤다면 말이다. 두 노인의 투닥거림에는 이걸 먹고 수험장에서 힘을 내라는 응원의 메시지가 깔려 있었다. 평범한 이들에게 웅장하고 드라마틱한 사건은 기대처럼 많지 않다. 어쩌면 좁쌀처럼 작은 행위와 마음들이 뒤섞여 우리네 삶을 만들고 지탱하며 성장시키는 게 아닐까. 나도 누군가에게 찰밥처럼 쫀득하고 윤기 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keyword
이전 01화당신들의 순함을 잊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