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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데이트 프로젝트를 성공시켜라

신촌 비엔나커피

by 카미유

- 토요일 2시 신촌 그레이스 백화점 앞에서 봐.

스무 살 93년 봄, 여자와의 첫 데이트 약속이 잡혔다. 신입생 3:3 미팅에서 만난 성신여대 그녀. 미안하지만 사실 그녀가 1순위는 아니었다. 세련된 색조 화장에 머리가 어깨너머까지 내려온 그녀의 예쁜 친구가 모두의 1순위였지만 긴 머리 소녀는 한눈에 봐도 세 남자 모두에게 관심이 없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는 진리를 일찌감치 깨달은 나는 우리의 시답잖은 개그를 잘 받아주던 2순위 그녀와 번호를 교환했다. 미팅을 하면 무조건 남자가 애프터를 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닌 터라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 부모님이 먼저 받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녀의 여보세요~ 음성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고 애프터에 성공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 석 달 남짓. 학교를 제외하고 가본 곳이라곤 종로 신촌 대학로 정도가 전부였는데 젊은이의 거리 신촌이 역사적인 첫 데이트 장소로 적당하다는 자체적 판단을 내렸다. 호기롭게 애프터 신청을 하긴 했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고민에 빠졌다. 나는 한 번도 여자와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밥 먹고 영화 보고 커피 마시고 정도의 루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뭘 먹고 뭘 보고 뭘 마셔야 데이트를 잘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요즘처럼 인터넷 맛집 검색이 있을 때도 아니고 서울 지리는 깜깜했다. 자고로 데이트란 남자가 여자를 멋지게 리드해야 하는 법. 서울 아가씨에게 촌티를 보여서는 안 된다. 길을 못 찾아 버벅거리거나 뭘 할지 갈팡질팡하는 꼴은 참을 수 없었다.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보는 건 아무래도 폼이 빠진다. ”바보야 여태 여자랑 데이트도 못해봤구나!“ 소리나 듣고 말겠지. 결국 답은 한 가지였다. 데이트 모의 연습. 시험에도 모의고사가 있는데 데이트라고 없으라는 법이 있나. 다음날 나는 오후 수업도 거르고 전철을 타고 신촌으로 향했다.


뭐든 잘 모를 때는 기본에 충실한 게 실패확률이 적은 건 당연지사. 밥-영화-커피의 스탠다드 코스를 설계하자. 일단 밥집부터 찾아다니던 중 스파게티 집을 발견했다.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지만 여자들이 스파게티를 좋아한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크림스파게티를 시켰는데 맛은 둘째치고 배가 전혀 차지 않았다. 이 가격이면 짜장면 곱빼기를 먹어도 남을 텐데 여자들은 왜 이런 걸 좋아할까. 하지만 내 입맛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여기 몇 번 와봤는데 크림스파게티가 맛있어” 라고 자연스레 그녀에게 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뭐 이날 처음 가봤고 스파게티도 처음 먹어봤지만 어쨌든 가본 건 팩트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다음은 영화인데 신촌 로터리 근처에 녹색극장과 신영극장이 있었다. 미리 로드쇼와 스크린 같은 영화 잡지를 예습했기 때문에 어떤 영화가 평이 좋고 재밌는지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의 영화 취향을 미리 물어보지 못한 건 실수지만 안전빵 선택으로 가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잡지에서 본 내용을 마치 내 의견처럼 얘기할 것이다. 이거는 이렇고 저거는 저렇고 요건 좋았고 저건 아쉽고 등등. 그렇게 열심히 주절대다 보면 그녀의 입에서 “너는 영화를 참 많이 아는구나!” 라는 칭찬을 들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커피인데 이 역시 비엔나커피가 맛있다는 말을 주워들은 적이 있다. 근처를 기웃거리다 화사한 인테리어가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가 비엔나커피를 시켰다. 얼마 뒤 휘핑크림이 산처럼 올라간 비엔나커피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학교 자판기 커피나 집에서 커피 설탕 프림을 1:2:2로 타 먹기만 하던 내가 이런 환상적인 커피를 만나다니. 비엔나커피를 싫어할 여자가 있을까. 이번 대사는 “혹시 비엔나커피 좋아해? 잘 아는 카페가 있거든.” 이 될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동선 체크와 시간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정도면 첫 데이트에 실패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5월의 신촌은 예상처럼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30분 일찍 나와 신촌 지하철역 출구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바짝 긴장했는지 손바닥에 땀이 나고 두 다리는 안절부절 출구 주변을 서성거렸다. 드디어 출구에서 그녀가 올라오는 게 보이자 재빨리 그레이스 백화점 앞으로 달려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그녀는 미안하니 밥을 사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파게티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맛있는 돈까스집이 있다며 선빵을 날리고 나를 이끌었다. 얼떨결에 스파게티 대신 돈까스를 먹으며 계획이 실패하자 초장부터 김이 빠졌다. 크림스파게티를 먹어야 했어. 이틀 전 수업까지 빠지며 시식까지 했는데 이게 뭐람.


그래도 낙담하기엔 일렀다. 스파게티는 실패했지만 나에겐 영화와 커피가 남아있었다. 돈까스를 꾸역꾸역 다 먹은 뒤 영화 얘기를 꺼냈더니 다행히 승낙했다. 하지만 계획했던 영화 제목을 대자 자기는 이미 봤다는 충격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아니, 언제 누구랑 벌써 본 거지? 혹시 몰라 극장 앞으로 가서 다른 영화를 살펴봤지만 시간대가 맞지 않았다. 그녀는 백화점 구경이나 하자며 다시 나를 그레이스 백화점 앞으로 끌고 갔다. 두 번째 계획도 실패. 나는 심통이 솟구쳐 쇼핑 내내 말도 걸지 않고 그녀의 애완견마냥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다리가 아프고 기분도 나빠지자 데이트고 나발이고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마지막 카드는 던져보고 죽어야 되지 않을까.


- 커피.... 마시러 갈래? 비엔나 커피.... 잘하는 곳 알고 있는데....

매가리가 없이 흐리고 처진 어투로 말했다.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단번에 그러자 말했고 왠일인지 이번에는 별말 없이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파악해 둔 동선을 따라 카페로 이동해 앉자마자 “비엔나커피 괜찮지?” 라고 던진 후 두 잔을 주문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 휘핑크림의 단맛이 혓바닥을 살포시 자극하자 이제야 굳어있던 몸과 마음이 한 꺼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밖은 아직 훤했고 이젠 달리 갈 곳도 없었다. 비엔나커피를 앞에 두고 우리는 5월의 길어진 해가 천천히 저물 때까지 긴 대화를 나누었다. 새내기 학교생활, 가족 이야기, 취미와 특기, 연예인 뒷담화 등 대화가 끊어질 만하면 소재가 전환되었다. 마지막 카드 비엔나커피는 성공한 것이다.


이후 우리의 만남은 이어졌고 마침내 여자친구가 되는.... 해피엔딩 시나리오는 완성되지 않았다. 그녀와의 만남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첫 데이트 프로젝트를 완수했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돌아오자 묘하게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자라나지 않았다. 내가 연락을 멈추니 그녀 역시 반응하지 않으며 둘의 관계는 싱거운 찌개처럼 끝나버렸다. 커피를 즐겨 마시는 편이 아니라 카페에 갈 일이 많진 않지만 들르게 되면 종종 커피 종류와 상관없이 휘핑크림을 듬뿍 올리곤 한다. 첫 데이트 상대가 되어 준 성신여대 그녀도 지금은 나와 같은 50대 중년이 되었겠구나. 어색한 서울말을 흉내내며 미간에 힘을 잔뜩 주던 안경잡이 스무 살 신입생을 기억하진 못하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나만 알고 있으면 되니까. 그날의 비엔나커피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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