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덕산의 메추리알
6살까지 살았던 내 고향 부산 서대신동의 기억은 다 짜버리고 표면에 들러붙은 케찹처럼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집 인근에는 지하철역이 생겼고 형과 함께 뛰어놀던 골목은 왕복 4차선 도로로 변모하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해도 구덕산만큼은 제 이름과 자리를 꼿꼿이 지키고 있다. 6살의 나는 할아버지, 형과 함께 일요일마다 구덕산에 올랐다.
구덕산의 높이는 565m인데 정상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오르기엔 멀고 험난해 그 높이가 가늠되지 않았고 우리의 등반은 항상 약수터에서 멈추었다. 할아버지는 환갑이 지났지만 동 나이대 노인보다 건강하고 기력이 넘쳤다. 우리가 없었다면 정상까지 단숨에 내달았을 것이다. 한 번쯤은 더 높이 올라봤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말했다.
- 아직은 힘들어서 안된다. 조금 더 크면 가자.
- 니는 쪼매나서 못 가. 나는 갈 수 있어도.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형은 자기가 어른이라도 된 양 으스댔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등산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산보다 바다를 좋아했지만 일요일 아침 해가 뜨면 등산 채비를 갖추었다. 가끔 아버지가 동행하기도 했지만 손주들과의 산행은 오롯이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한 듯 보였다. 우리 역시 할아버지와의 동행을 반겨 일찌감치 눈이 떠졌다. 대문 앞을 나서자마자 형과 나는 할아버지의 양손을 잡고 걸어갔다. 길을 걷다 다른 것에 시선을 뺏겨 손을 놓고 달려가 봐도 이윽고 두 아이의 손은 제집에 돌아온 마냥 다시 할아버지의 양손에 달라붙었다.
구덕산 입구 흙길부터 시작되는 코스는 완만한 길이 이어져 어린아이의 걸음도 버겁지 않았다. 형을 따라 뛰다가 자갈에 걸려 넘어져도 흙을 털고 곧바로 일어났다. 눈앞의 즐거움이 앞선 아이는 제 몸의 상처를 깨닫지 못하기 마련이다. 뒤따라오던 할아버지가 내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뒤 상태를 확인했다.
- 조심해서 가야지. 이따 집에 가서 약 바르자.
그제야 무릎이 까인 걸 알고 통증이 전달됐지만 우리는 고지를 향하는 병사처럼 약수터로 진군을 계속했다.
약수터에 도착하기 위해 반드시 거처야 할 관문이 있는데 통나무 다리였다. 길이 10m 정도의 커다란 나무를 반으로 잘라 개울가 위에 다리처럼 걸쳐놓았다. 바로 아래 지렁이 모양의 개울물이 흘렀고 높이는 성인 남자 키에 조금 못 미쳤다. 다리 앞에서 할아버지는 주춤거리던 나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그의 건강한 팔뚝에 힘이 들어가자 나는 양손으로 목을 감싸고 한쪽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두 다리가 뜬 시간은 십여 초에 불과했고 지면에 닿는 순간 뒤따라온 형도 옆에 서 있었다.
약수터 앞은 먼저 도착한 등산객들이 줄을 서서 약수물을 받고 있었다. 다수의 입이 거쳐 간 빨간색 자루바가지에 물을 채운 할아버지는 우리를 차례로 먹인 뒤 남은 물을 목울대가 출렁거리도록 단번에 들이켰다. 다음 코스는 말하지 않아도 정해져 있었다. 등산을 온 가장 큰 목적, 그건 바로 약수터에서 파는 메추리 알을 먹는 것이다. 물을 먹자마자 먹거리를 파는 퉁퉁한 몸집의 아저씨 앞으로 달려갔고 할아버지는 늘 똑같이 삶은 메추리 알 한 팩과 콜라 한 병을 주문했다. 평소 돈을 아끼는 할아버지였지만 이것만큼은 주저함이 없었다.
우리는 근처 바위에 앉아 메추리 알을 까서 소금에 찍어 먹었다. 목이 막히니 콜라를 마셔가며 먹으라는 할아버지의 말도 무시한 채 한 개라도 더 빨리 먹기 위해 껍질 까는 손은 재바르고 진지했다. 마지막 한 알이 형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이번에도 형이 더 많이 먹은 것 같았다. 하산길에서 다시 통나무 다리 앞에 섰다.
- 나도 건널 수 있어. 자, 봐봐.
조금 떨리긴 했지만 통나무 다리 위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기분 탓일까, 분명 나무는 가만히 있는데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 발걸음은 힘껏 달음질해 건너편에 무사히 도착했다. 나 잘했지? 라는 눈빛을 보내자 할어버지는 기특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이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야. 나도 2년 뒤엔 형처럼 학교를 갈 수 있어.
그렇지만 나는 다음 산행 때 일부러 다리 앞에 선 채 할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혼자 건널 수 있지만 나를 안고 건너 달라는 신호였다. 할아버지는 이 눈짓을 외면하지 않았고 전처럼 번쩍 안아 다리를 건넜다. 내 다리가 아닌 할아버지의 넓은 품에 안겨 공중에서 움직이던 그 짧은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이듬해 우리 가족은 고향 집을 떠나 이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국민학생이 되었다. 성장이 더딘 탓에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구부러진 할아버지의 키를 간신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해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렸고 십수 년을 더 살다가 내가 두 번째 직장에 어렵게 들어갔을 때 조용히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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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반찬을 만들어 먹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메추리 알 조림은 단골 메뉴가 되었다. 알이 작아 계란 조림에 비해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다. 이미 조리가 끝난 것도 팔지만 나는 쌩 메추리 알 한 판을 사서 삶고 식히고 껍질을 까고 쪼리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친다. 껍질을 까면서 무심코 하나씩 집어먹다 보니 조림장에 들어가기 전 이미 몇 개가 줄어있었다. 메추리 알 하면 할아버지가 절로 떠오른다. 좋아하는 음식은 본연의 맛에 더해 특정한 경험과도 맞물려 있다. 행복한 경험으로 남았다면 그 음식조차도 애정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할아버지의 음식 취향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뭐든 군말 없이 주는 대로 받아먹어 과연 저 노인에게 취향이라는 게 존재할까라는 의문조차 들었다. 아무리 먹을 게 귀하던 시절이지만 특별히 좋아했던 음식 하나조차 떠올리지 못한다는 건 그의 긴 인생을 돌아볼 때 다소 심심한 대목이었다. 할아버지는 음식 취향처럼 성격도 무던하고 온화하며 무해한 조금은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구덕산의 메추리 알을 맛있게 먹었던 건 확실하다. 정말로 맛이 있었는지 맛있게 먹는 우리를 보고 입맛이 절로 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 그를 추억할 수 있는 음식 하나가 남았다는 게 의미 있는 것이지. 불현듯 그때 가보지 못한 구덕산 정상을 올라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당신은 비록 떠나고 없지만 오래전 당신이 품에 안고 건넜던 그 조그만 아이가 이제는 정상까지 갔다는 걸 자랑하며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