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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Sep 21. 2023

보이지 않는 4

새 안경을 맞추기 위해 근처 안경점에 들렀다. 라식수술 이후 세 번째 안경인 셈이다. 시력이 많이 떨어지셨네요. 한 번에 도수를 갑자기 높이면 눈에 부담이 가니 어지럽지 않게 맞춰 드리겠습니다. 짐작했던 것보다 눈 상태는 더 좋지 않았고 노안에 따른 퇴행현상을 피해가지 못했다. 제시한 렌즈와 테의 가격을 확인한 다음 내일 찾으러 오라는 사장님의 말을 듣고 나왔다.

      

마스크 속 입김이 시야를 가려 안경을 벗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안경을 썼다. 60명이 넘는 학생들 중 안경을 쓴 아이는 내가 유일했다. 아이들은 모두 내 안경을 써보고 싶어 했다. 안경은 어린 아이가 소유하기 힘든 물건이었으니까. 그거 쓰면 잘 보여? 한번만 써 보자. 안경을 낀 아이들은 아 어지러워~ 빙글빙글 돌아~ 같은 말을 뱉어낸 뒤 돌려주었다. 간혹 돌려받지 못하는 케이스도 있었다. 아이들의 손과 손을 거치다 보면 때때로 안경 없이 흐릿한 칠판에 눈을 찡그려가며 수업을 들어야 했다.

     

안경닦이 천으로 렌즈를 닦다가 습관적으로 엄지와 검지 끝을 모아 미간의 주름을 폈다.

한 아이가 안경 없이 어디까지 볼 수 있는지를 테스트했다. 몇 발자국 앞에서 안경을 벗은 나에게 손가락을 펴 보인다. 이거 몇 개야? 맞추면 한 발짝 뒤로, 틀리면 한 발짝 앞으로 와서 다시 묻는다. 몇 개야? 특별한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뭐든 호기심이 많을 나이니까. 그는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얼굴이었다. 다음 해 시력검사표 최상단의 ‘4’ 가 보이지 않았다. 시력은 양수가 아닌 음수로 바뀌었다. 보이지 않는 눈을 자주 찡그리다 보니 미간은 상시로 화가 나 있었다.

     

길거리 간판을 둘러보자 보이지 않는 글자들이 더 많았다.

나는 ‘4’ 가 표기된 표준 시력 검사표를 모두 외웠다. 안경을 벗고 시력을 측정해도 입맛에 맞는 시력을 가질 수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명암과 위치는 구별 가능했다. 나는 막대가 가리키는 방향과 패턴을 파악한 다음 시험지를 풀 듯 차례차례 맞추어 나갔다. 자 어때, 이래도 못 본다고 말할 거니. 너희들처럼 잘 보인다는 걸 확인받길 원했고 가짜 시력으로 그들을 속이는 야릇한 순간을 즐겼다.

     

깨끗해진 안경을 다시 쓰고 선명해진 주변 풍경을 보았다.

라식수술이 한국에 처음 도입되던 해에 수술을 받았다. 어차피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안경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초창기의 위험성과 고가의 비용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안경이라는 장막을 걷어낸 세상은 믿기 힘들 만큼 청순하고 황홀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감당해야 할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에서 해방되었다. 그렇게 깨끗한 눈은 젊음의 끝자락까지 함께 걸었다.

     

다음날 새 안경을 받았다. 햇빛에 반사된 테두리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게 제법 맘에 들었다. 바깥 풍경은 눈부시게 선명했지만 이젠 안경 없이 ‘4’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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