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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Sep 26. 2023

노랭이 영감

영훈의 이야기

영훈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에 납득이 갈 것이다. 살면서 그가 타인에게 해를 가하거나 남 탓을 하는 건 거의 본 적도 듣지도 못했다. 지켜야 된다고 하는 행위들은 칼같이 준수했고 고지식하며 융통성이 없었다. 내 할아버지라서가 아니라 영훈 같은 사람만 있다면 세상은 평온하고 안전할 것이다. 나는 나이를 떠나 영훈을 인간적으로 좋아했고 본받을 점이 많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영훈에게 개인적인 불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돈을 지나치게 아낀다는 거였다. 뭐든 부족했던 시대를 거쳐 온 사람이라 본능적인 절약정신이 박혀있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영훈은 가끔 도가 지나친 절약으로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었다. 자신을 위해 돈을 쓰지 않고 개인적인 물욕이 없는 건 성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성자의 경우 먹는 인심만큼은 푸짐했고 가족, 특히 손자에게 쓰는 돈은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본인은 맨날 같은 옷 같은 신발만 신어도 아버지에게 받은 용돈으로 손자들에게 좋은 옷과 비싼 학용품을 사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나와 형은 부산에 살면서도 해수욕을 못 해봤으니 해수욕장에 가자고 아버지를 졸랐다. 애들이 저렇게 원하니 부모 입장에서 들어주고 싶었겠지만 당시 아버지는 회사 일과 어머니 병간호로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자연스레 임무는 두 노인에게 넘어갔는데 평소 땀이 많고 몸이 무거운 성자는 덥고 복작거리는 걸 질색했다. 결국 최후의 선택은 영훈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오는 거였다. 성자는 냉장고에서 참외와 수박을 찬합에 담아 손에 들려줬고 아버지는 애들 밥값에 쓰라며 천 원짜리 지폐 여러 장을 영훈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장소는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정했다. 나와 형, 그리고 얼마 전에 놀러온 사촌까지 우리 세 명은 영훈의 인도 하에 들뜬 마음으로 버스를 탔다.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다들 신이 나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영훈은 커다란 검은 색 튜브 하나를 빌려 셋을 동시에 앉힌 다음 물을 저어 나아갔다. 처음 본 그의 수영 솜씨는 수준급이었고 깊은 곳으로 갈수록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한참을 놀고 돌아와 성자가 싸준 과일을 나눠먹으며 돗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이번에는 영훈 없이 셋만 물속에 들어가 물놀이를 했고 점심때가 되었다. 

“할아버지 배고파요. 맛난 거 먹으러 가요”

허기를 느낀 우리는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영훈의 옆에서 칭얼거렸다. 그는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잘 놀았냐고 묻더니 대뜸 집에 가자는 말을 꺼냈다. 정오가 훌쩍 지나긴 했지만 해가 아직 중천에 떠 있는데 벌써 가자고 하니 다들 어리둥절했다. 

“밥은 집에 가서 먹자”

참다못한 형이 해변가 노점상의 번데기와 솜사탕이라도 사 달라 졸랐지만 불량식품은 먹는 게 아니라면서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우리는 결국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날은 덥고 먹은 거라고는 과일 몇 조각과 물밖에 없고.... 부풀었던 마음은 한순간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집에 돌아오니 성자가 윗옷을 벗은 채 선풍기 바람 앞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영훈은 성자를 흔들어 깨운 뒤 밥을 차리라며 다그쳤다. 비몽사몽 상태에서 깬 성자는 왜 벌써 들어왔냐고 묻자 영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밥 먹으러 왔다고 말했다.

“이 시간까지 애들을 쫄쫄 굶기고 다녔어요?”

“밖에서 사 먹는 거 비싸기만 하고 먹을 것도 없어”

성자는 기가 차다는 얼굴로 잠시 영훈을 노려보더니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딴 건 몰라도 손자들 밥을 안 먹였다는 건 성자의 입장에서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이 노랭이 영감아! 로부터 시작해 벌써 노망이 들었냐. 밥 사 먹이라고 준 돈을 그대로 들고 오는 인간이 어딨냐. 내 앞에서 밥 차리라는 말이 나오냐. 애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냐 이 영감탱이야 등등 욕설에 가까운 말이 필터 없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솔직히 우리들은 심통이 나서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좀 혼내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성자의 데시벨이 예상보다 더 높아지자 점차 불안해졌다. 성자는 몽둥이만 안 들었지 무슨 대역죄인 다루듯 그를 몰아부쳤고 영훈은 고개를 숙인 채 벌 받는 학생의 모양새였다. 눈치 빠른 형이 우리 너무 배고프니 밥을 달라고 하자 마지못해 성자는 화를 가라앉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으로 들어가기 전 당신은 밥도 먹지 말라며 영훈에게 레이저 빔을 쏘았다.

      

허겁지겁 밥을 다 먹은 우리들은 포만감에 취해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난 다음 주사위 게임을 하고 있는데 영훈이 방문을 슬그머니 열면서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 검은 비닐봉지에서 뭔가를 꺼냈는데 투게더 아이스크림 이었다. 평소 100원짜리 하드나 간혹  300원짜리 빵빠레 정도였는데 세상에나~투게더라니! 투게더는 1년에 두세 번 먹을까 말까할 정도로 귀한 물품이었다. 아~할아버지가 정말 큰 결심했구나. 그날의 서운함은 투게더와 함께 눈 녹듯이 일시에 사라졌다. 영훈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우리는 영훈에게 같이 먹자며 나무 숟가락을 내밀었고 서로 짜기라도 한 듯 성자를 부르지 않았다. 숟가락 네 개가 통 안을 휘젓는 동안 투게더는 얼마 못 가 바닥을 드러냈다. 그가 우리를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잘 삐지는 만큼 쉽게 풀릴 줄도 아는 솜털 같은 가벼움을 잃지 않던 아이들이었으니까. 영훈에게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니 이따 저녁에 먹으면 된다며 이 노랭이 영감은 그제야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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