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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Feb 27. 2024

고려거란전쟁에 대한 짙은 아쉬움

작년부터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을 재미있게 봤었다. 보고 있다가 아닌 봤었다 라고 표현한 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어쭙잖은 퓨전사극이 아닌 간만에 보는 정통사극이고 많은 사극 명작을 제작했던 사극 종가집 KBS에서 방영되기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고려거란 전쟁이라니! 무엇보다 식상했던 조선시대를 벗어났고 전쟁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기대감은 절로 상승했다. 드라마는 거란과의 1차 전쟁 이후 3차 귀주대첩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32부라는 정통사극치고 다소 짧은 분량이 아쉽긴 했지만 첫 화부터 흥미를 끌었다. 강조의 반란과 현종의 즉위로 이어지는 초반부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캐릭터와 서사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조선에 비해 사료가 무척 부족하지만 고려 현종 시기는 워낙 이야기 거리들이 많고 원작소설까지 있어 이후의 전개에 전혀 무리는 없을 것으로 봤다. 적어도 드라마의 절반인 16화 양규의 죽음과 2차 거란전쟁의 마무리까지는 그랬다.

     

이런 사극 드라마를 볼 때면 새로운 인물을 발굴하고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고려의 이순신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활약을 펼쳤던 2차 거란전쟁의 주역 양규가 그렇다. 서희와 강감찬은 모두 알지만 양규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 나 포함해서 얼마나 될까. 그는 강감찬 못지않은 구국의 영웅이자 서사를 지닌 인물로 이번에 주목을 받게 된 건 드라마의 순기능이라 고도 볼 수 있다. 강조 역시 반란의 주역이지만 스스로 권력을 탐하진 않고 고려를 위해 싸우다 죽은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졌는데 이원종의 명연기와 함께 빛이 났다. 이후 2차 전쟁의 하이라이트인 양규, 김숙흥의 활약상은 드라마의 재미와 감동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적은 제작비로 인해 전투신의 규모가 대폭 축소된 점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이건 돈이 없어 어쩔 수 없는 부분 아닌가.

     

양규 장군님~ 진심 당신이 그립습니다


문제는 17화부터 드라마가 조금씩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2차 전쟁 이후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3차 귀주대첩 사이의 분량을 어떻게 채우는가가 관건이었는데 여기서 작가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 그 시발점은 가상인물 박진이 드라마의 흑막이자 주연으로 부상하는 시점이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역사왜곡과 막장 식 전개가 펼쳐지는데 그야말로 개연성 따위는 내던져버린 드라마가 되었다. 여인들의 궁중암투, 호족과의 대립, 김훈 최질의 난으로 이어지는데 그나마 앞의 둘은 어느 정도 참작해줄 요소는 있었다. 궁중암투는 뜬금없고 유치했지만 분량이 길지 않고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 정도로 받아들였다. 호족과의 마찰도 황제 앞에서 칼을 겨누는 등 어이없는 장면이 있었지만 실제 역사를 근거로 한 거라 필요한 대목이긴 했다.

    

하지만 김훈 최질의 난은 어떤 형태로도 용서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고작 4개월 만에 끝난 이 무신의 난에 무려 6회 차를 소모해 버렸다. 드라마가 100부작이라도 되면 모를까 고작 32부작 드라마에 6회를 쓰면서 이제 남은 회차가 겨우 4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연장이 없다면 이 4회 안에 귀주대첩의 승리까지 다 끝내야 하는데 얼마나 날림으로 때울 것인지가 훤히 보인다. 사료의 부족이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게 그 사이에 여러 자잘한 사건들은 많았다. 전투신이 부담스러우면 개혁군주로서의 현종의 성장과 3차 전쟁 준비만으로도 컨텐츠는 충분한데 작가가 뭐에 취했는지 박진을 앞세워 막장불륜 식 전개를 밀어붙였다. 

은근 귀요미 캐릭터 배압이 형과 거란 황제

   

작가는 박진 캐릭터를 만들 때 두 아들을 전쟁에서 잃었다는 사연을 바탕으로 복수심에 찬 입체적인 인물로 그리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박진의 행보에 공감하는 시청자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의 행보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고 납득할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 설령 악인이라도 매력이 느껴지려면 인물의 행동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박진 얼굴만 보면 짜증만 유발된다. 강조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악역 포지션인 김치양, 이현운 같은 인물과 비교해 봐도 박진이 얼마나 일차원적으로 설계된 캐릭터인가를 알 수 있다. 일개 호장 주제에 무장들을 장악하고 황후를 조종하며 황제 앞에 칼까지 겨누는 장면을 보면서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어처구니없는 실소가 나왔다.      

제발 좀 뒤져라 박진 이 새끼야


더 큰 문제는 박진으로 인해 기존 캐릭터들이 붕괴되고 서사마저 개연성을 잃고 무너졌다는 것이다. 일단 똑같은 반란자임에도 최질은 쳐 죽일 놈으로 묘사하고 김훈은 의리를 지킨 충신으로 만들었다. 둘의 성향을 다르게 설정하는 건 납득이 되지만 선인과 악인의 이분법으로 묘사한 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정왕후는 생각 없는 꼭두각시로 만들고 현종은 감정에만 치우치는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군주로 그려냈다. 그는 마치 신이라도 된 양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행동하며 드라마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맹세컨대 박진은 처음부터 전혀 필요가 없는 캐릭터였다. 실존인물도 아니거니와 김훈 최질의 난은 무장에 대한 홀대와 차별로 분노가 극에 쌓여있던 상황이라 그가 없어도 난을 일으킬 동기는 충분했다.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박진 하나를 띄우려다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피해를 봤는지 알기나 할까. 

이렇게 예쁜 이시아를 쌍X으로 만들어 놓다니

   

역사적 기록이 없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쓰라는 말은 아니다. 가상의 요소를 삽입해야 할 때 그 공백의 자리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메꾸는가가 작가의 역량인 것이다. 그 점에서 고려거란전쟁의 방식은 한참이나 잘못되었다. 과거에 방영했던 정도전은 높은 완성도로 호평을 받았고 거기서 이인임 캐릭터를 얼마나 매력적으로 재창조했는지를 보면 알 것이다. 대장금 역시 실록 에 적힌 몇 줄이 전부였지만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으로 사극 역사에 남을만한 드라마가 되었다. 이제 남은 회차는 4회. 그동안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 끝까지 시청은 하겠지만 나에게 고려거란전쟁은 결국 찝찝하게 실패한 드라마로 기억될 것이다. 애정이 있었기에 그 실망감은 더 클 수밖에.     

솔까말 작년 연기대상은 김동준이 받았어야 했는데 수종 아재 날로 먹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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