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미유 Mar 20. 2024

마라톤 대회를 나가는 이유

3.1절 기념 단축 마라톤. 인천대학교에서 출발하는 올해 첫 참가 대회였는데 새벽부터 영하 5도의 강한 꽃샘추위가 밀어닥쳤다. 더운 거보다 추운 게 뛸 때 좋긴 하지만 이날은 너무할 정도로 바람도 강하고 추웠다. 실내에서 한참을 피신하다 출발 5분 전에야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긴팔 긴바지에 장갑까지 꼈는데도 몸은 자동으로 부들거렸다. 출발총성이 울리고 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초반부터 페이스를 올렸다. 맞바람을 뚫고 달리는 와중에 땀은 맺힐 겨를도 없이 증발해버렸다. 러너들 틈 사이에 끼여 정신없이 달려 골인했고 예상대로 기록은 평소보다 괜찮게 끊었다. 허겁지겁 패딩을 걸쳐 입고 차에 오르고 나서야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쉽지 않은 레이스였지만 몸 상태는 개운했다. 그래 이 맛이야, 이 맛에 하는 거지.

      

2012년부터 매년 서너 차례 대회에 나가다 보니 수집한 메달만 해도 수십 개에 달한다. 누가 들으면 마라톤 찐 매니아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마라톤 자체를 즐긴다기보다 마라톤 대회를 즐긴다는 표현이 맞다. 평소에 러닝 연습을 하지도 않고 풀코스는 물론 하프코스 완주도 두 번밖에 되지 않는다. 늘 10킬로미터만 달린 셈인데 1시간 남짓의 짧은 거리지만 그 순간은 변함없이 즐거웠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한데 뭉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나의 목표점으로 향하는 과정은 직접 달려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체험이다. 이런 식의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과거의 기억들과 맞물려 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운동을 못했다. 선천적으로 재능이 없기도 하지만 안하고 피하다 보니 더 못해진 측면도 있었다. 특정 종목과 분야만 못한 게 아니라 골고루 다 못했다. 축구를 하면 개발질이고 농구를 30분 뛰면 한 골도 넣지 못했다. 구기종목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달리기를 하면 늘 상대의 뒤를 보며 뛰었고 던지기를 하면 공은 매가리 없이 떨어졌다. 근력 순발력 지구력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었다. 이러다 보니 남들 다 좋아하는 체육 시간이 너무 싫었고 체육 수업이 있는 날이면 비가 내리길 기도했다. 특히 단체운동을 할 때는 더더욱 그랬다. 팀에 해가 될까봐 조심조심 눈에 띄지 않으려 했고 실수해서 핀잔이라도 들으면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기뻤던 점 하나는 더 이상 강제로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그렇게 긴 시간동안 운동을 멀리하는 삶을 살았다.

     

처음 나이키 마라톤 대회에 나가게 된 건 한 후배의 권유였다. 그도 운동을 좋아하는 녀석은 아닌데 나이키 대회는 달리기보다 즐기고 노는 곳이라며 참가를 부추겼다. 10킬로미터. 당연히 한 번도 뛰어본 적 없고 뛸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거리였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완주했고 메달을 받았다. 기록은 형편없었지만 기분은 너무 좋았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순간이었다. 레이스에 참가한 대부분은 정말로 즐기면서 뛰고 있었다. 중간에 걷기도 하고 잡담도 하면서 여유를 부려도 괜찮고 서로 경쟁하지 않았다. 빨리 가기를 재촉하지 않고 늦게 왔다고 혼내지 않았다. 그냥 내 페이스로 달리기만 하면 그만이고 타인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행복했다. 이후 나는 봄가을이면 대회에 나가 낯선 사람들과 함께 달리고 땀 흘리며 완주의 상쾌함을 공유했다.


최근 들어 처음 시도하고 배워보는 일들이 많다. 거의 모두 삶에서 굳이 필요하지 않으며 경제적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너무 늦었다는 말도 가끔 듣곤 한다. 하지만 늦은 건 늦은 거고 내 인생에서는 모든 게 시작일 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늘어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그 모든 게 결코 무가치한 경험은 아닐 거라 믿는다. 더는 잘하지 못한다고 숨지 않을 것이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즐기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세상에는 못하는 사람도 있어야 잘하는 사람이 빛을 발하지 않겠는가.  나만의 보폭과 속도로 부지런히 달리다 보면 설령 계획된 목적지가 아니더라도 어딘가에는 도달해 있지 않을까. 그 속에서 함께 달려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 고마운 일이고.


매거진의 이전글 고려거란전쟁에 대한 짙은 아쉬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