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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Mar 12. 2024

고단했던 시절의 엔지니어

영훈의 이야기

누가 영훈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엔지니어라고 답하겠다. 그는 정말 타고난 손재주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영훈과 같이 살았던 시간동안 그의 능력에 감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전기, 기계, 수도, 목공, 건축 등 인간의 손을 거치는 공학적인 분야에서 못하는 게 없었다. 학력은 초등학교가 전부였지만 선천적인 예민함과 현장을 직접 뛰어다니며 체화된 감각은 책으로만 배운 고등룸펜들이 따라오기 힘든 영역이었다. 영훈의 능력은 젊은 시절부터 이미 발현되고 있었다. 


지난 명절 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에게 영훈의 오래 전 과거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렇게 오래 동거했음에도 영훈의 젊은 시절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원래 자기 이야기를 안 하는 타입이기도 했고 그땐 그의 과거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영훈은 만주에서 태어나 자랐고 성자와 결혼한 뒤로는 황해도 해주 근처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넉넉지 않은 집안에다 일제 강점기 시절이라 교육다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직업도 가질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부모 형제들도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떴고 내가 작은 할아버지라 부르던 동생 하나만 살아남아 만주를 떠나온 것이다. 하나 둘씩 태어나는 자식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날품팔이 막일이라도 해야 했는데 어느 날 한 작은 공장의 사장 눈에 띄면서 본격적인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땜빵으로 들어간 자리였지만 워낙 손놀림이 탁월하고 부지런해 얼마 안가 작업반장 위치까지 올랐다.

      

“할아버지가 옛날에 커다란 추레라(트레일러)도 몰았다.”

아버지의 이 말을 듣고 나는 살짝 놀랐다. 살면서 영훈이 운전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가 포니 자동차를 처음 샀을 때도 영훈은 운전대를 전혀 잡지 않았다. 대형 트레일러를 모는 영훈의 모습을 떠올리는 게 쉽지는 않지만 짐작컨대 그의 솜씨라면 충분히 잘 몰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은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좀 먹고 사나 싶더니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려 일을 관두고 병석에 누웠다. 그 시절 장티푸스는 치사율이 높은 무서운 질병이라 생사를 보장할 수 없었다. 이때 성자는 중요한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그녀의 고향 친척들이 있는 부산으로 떠나기로 했고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신의 한수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만주를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조선족이 되었을 거고 부산으로 내려오지 않았다면 북한사람이 되었을 테니 니들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다”

아버지는 그때를 회상하며 남한에서 살게 된 게 천만다행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부산으로 내려온 뒤 영훈의 병은 호전되었고 얼마 안 가 6.25가 터졌지만 전쟁의 화마도 피할 수 있었다. 건강해진 영훈은 다시 일을 시작했고 그를 원하는 일감은 끊이지 않았다. 이제는 경제적으로도 숨통이 트여 피난민들에게 셋방을 내어주기도 하면서 자식 육남매를 건강하게 키워냈다.

     

사실 영훈은 단순히 만드는 것만 잘하는 게 아니라 예술적 재능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버지 역시 영훈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손재주가 뛰어나긴 했지만 기능적인 측면에 치우쳐 있고 섬세한 미적 감각은 떨어졌다. 한 예로 두 사람이 각각 만든 옥상의 화단을 비교해보면 영훈의 화단이 구조학적으로나 미적으로나 훨씬 예쁘게 잘 설계되었다. 그는 무엇을 만들던 마감작업에 많은 공을 들이는 스타일이라 항상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영훈에게 받은 장난감들이 많은데 하나같이 퀄리티가 높아 반 아이들에게 자랑하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나는 영훈이 더 좋은 시절에 태어났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영훈은 손재주뿐만 아니라 한자와 일본어를 마스터했고 신문과 책을 가까이 해 상식도 풍부한 재능 넘치는 사내였다. 아마도 정규 교육을 제대로 다 받았다면 어떤 분야든 뛰어난 인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대가 너무 불행했다.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시대가 제일 힘들고 불행하다곤 하지만 절대적 기준에서 영훈이 살았던 시대와 비교할 수 있을까. 태어나자마자 나라 없는 일제 강점기를 겪었고 해방의 기쁨을 누린지 얼마 안 가 전쟁이 터지고 전쟁이 끝나자 극심한 빈곤 속에 좌우대립과 기나긴 군사독재 정권을 맞아야 했던 시절. 그건 비단 영훈 뿐만 아니라 꿈과 욕망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앞장서서 젊음을 잃어버렸던 그 시대 모든 사람들의 시간이자 아픔이었다. 그런 점에서 역경의 시대를 헤쳐 나와 후손들의 자리를 마련하고 돌아가신 윗세대 모든 분들께 감사와 경의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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