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 옛날부터 민간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주로 구전되며 어떤 공동체의 내력이나 자연물의 유래, 이상한 체험 따위를 소재로 한다.
율베리아의 찬바람을 몰고 기말고사 시즌이 다가왔다. 셋 다 중간고사를 망쳐서 이번에는 공부를 좀 해야겠다고 맘은 먹었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여전히 우리는 책을 덮어둔 채 캠퍼스를 방황했다. 기말고사 전에 알바를 관둘 거라는 덮밥은 보란 듯 제 말을 실천했다. 학업에 충실할 것 같은 이미지는 아닌데 그래도 생각 없이 노는 애는 아니었구나. 알바가 바뀐다고 덮밥의 맛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덮밥 없는 덮밥 집은 흥미가 없어 자연스레 발길을 끊었다. 나는 락희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어차피 면전에서 제대로 말도 못하는 판국에 차라리 편지가 낫지 않을까 판단했다. 연애편지라면 과거 짝사랑했던 선생님한테 수십 통을 써 본 이력이 있어 어색하지 않았다. 도서관에 가면 커튼 구석에서 잠만 잤지만 이 날은 서가를 돌며 책들을 뒤적거렸다. 사랑의 단상, 독일인의 사랑.... 대충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들을 모아 대출카드에 기록했다. 다들 시험공부에 몰두하고 있을 그 시간, 나는 책 속에서 베껴 쓸 만한 사랑의 밀어들을 탐독했다. 장문의 편지는 쓰고 고치는 과정에서 줄었다 늘었다를 반복했고 쓰레기통에는 색색의 편지지 뭉치들이 쌓여갔다.
- 집에 가서 읽어봐.
전날 내린 눈이 모두 증발해 날아간 맑은 오후. 나는 락희를 불러내 편지를 전했다. 조금 당황한 얼굴로 뭐냐고 물었지만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편지를 받아 든 그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내가 시선을 피하고 있는 공백을 틈타 먼저 뒤돌아섰다. 집에 가서 읽으라고 했지만 연애편지를 받고 진짜 집에 가서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락희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봉투가 너무 길어 그녀의 외투 주머니 속에 들어가지 않았다. 락희는 편지의 방향을 요리조리 바꿔봤지만 튀어나온 모양새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편지를 반으로 접어 삐져나오지 않게 주머니에 꼭꼭 넣고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구겨진 편지처럼 내 마음도 같이 접혔다.
학기가 끝나기 전 각자 가져온 야구 용품들을 회수해 갔고 내 미즈노 글러브 두 개도 돌아왔다. 사용을 몇 번 안 해서 그런지 칠도 벗겨지지 않았고 완전히 길이 들지도 않았다. 기말고사가 끝난 날 쫑파티를 마치고 성훈이 살고 있는 목동 아파트로 이동해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집이 좀 살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실내 곳곳에서 배여 나오는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확실히 우리 집과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 더블 헤릭스는 니네 둘이서 잘 운영해봐.
- 우리가 왜? 너 없음 안 해. 아니, 못해.
나와 민재는 이구동성으로 거절했다. 나 성훈 민재로 구성된 삼각형의 축이 허물어지는 걸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사실 더블 헤릭스는 과에서 공식 허가를 받은 동아리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셋이 충동적으로 만든 팀이었다. 우리가 사라진다면 팀이 유지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만큼 더블 헤릭스에 애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나는 극장에서‘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혼자 관람했다. 숨 막히게 매력적인 맥 라이언을 보면서 락희를 생각했다. 그녀와 같이 이 영화를 봤다면 진정 잠 못 이루는 크리스마스가 되었을 텐데. 이후 맥 라이언 특유의 단발머리를 볼 때마다 락희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새해가 밝자 성훈은 미국으로 떠났고 나는 학사경고를 받았다. 형편없는 성적을 받을 거란 건 짐작했지만 그래도 학사경고라니. 결과적으로 다음 학기 수강은 15학점으로 제한되었다. 새 학기가 되면서 조경과와의 공통교양 수업은 없어졌지만 어차피 같은 단과대 건물이라 오고 가면서 락희의 얼굴을 가끔 보긴 했다. 남자친구가 생긴 건지 어쨌는지 학년이 올라가더니 확실히 화장이나 스타일이 많이 세련되어진 느낌을 받았다. 더블 헤릭스는 예상대로 자연해체의 수순을 밟았다. 멤버들 사이에서 이에 관한 얘기가 오가긴 했지만 지속하기에는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었다. 나는 학사경고로 학교생활에 대한 의욕이 바닥까지 꺽였고 간신히 학고를 면한 민재는 졸업이라도 제때 하려면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자각했는지 뒤늦게 열공모드로 돌아섰다.
어느 날 저녁 1학년 신입생들과의 술자리에서 더블 헤릭스에 대한 얘기가 튀어나온 적이 있었다. 이들은 유전과에 야구팀이 있었다는 걸 신기해했고 왜 없어졌는지 궁금해 했다. 순간 나와 민재는 어린아이처럼 더블 헤릭스의 지난 이력을 흥이 나서 떠들어댔다. 처음엔 호기심을 보이던 애들이 듣다 보니 별 게 없다는 걸 파악했는지 주책바가지 선배들의 술주정에 마지못해 맞춰주고 있었다.
- 그럼 더블 헤릭스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어요?
그래 한 번도 못 이겼지.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한 번밖에 지지 않았어. 무수한 실패의 삶에서 겪게 되는 한 번의 패배였을 뿐이야. 너희에게 더블 헤릭스는 술 취한 선배들의 추억팔이 정도로만 들리겠지만 유전공학과에 야구팀이 있었다는 걸 우리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단다. 훗날 다시 이 곳에 야구팀이 생기게 되면 먼 과거에 더블 헤릭스라는 야구팀이 존재했다는 걸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
< 끝 >
/ 에필로그 /
저에게 대학시절은 지워버리고 싶은 시기에 가깝습니다. 성적은 바닥을 찍었고 긴 우울증을 겪는 와중에 인간관계도 최악으로 치달았던 시간이었죠.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던 때였습니다. 그 속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행복했던 기억은 더블 헤릭스를 만들고 활동했던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꼬맹이 시절부터 야구는 삶의 든든한 동반자였습니다. 비록 응원팀의 성적은 매년 실망스럽고 야구에 대한 애정이 예전만큼 못해도 저에게 야구란 항상 설레임을 안겨주는 무엇이었죠. 처음 구상은 소설의 형태로 쓰려 했지만 에세이로 남긴 건 암울했던 대학시절의 미미한 빛 한 조각을 찾아보고 싶었던 개인적인 바람이었고 끝까지 즐겁게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