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만이 누리는 규칙적인 쉼의 미학
불과 몇달 전만 해도 나의 '쉼' 은 꽤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타났다.
친구들과 수다 떨기, 엄마 껴안기, TV보기, 책 읽기, 영화 보기, 혼자서 전시회 가기 등등.
나름 선택지들이 풍요로왔고, 꽤나 다채로웠다.
그러다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종종 여행을 갔다.
공항에만 닿아도 설레는 그 기분을 누리기 위해서.
물론 이건 다 내가 직장을 다닐 때 이야기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가졌던 가장 큰 불만 두 가지는, '왜 나는 남의 돈을 벌어주고 있는가?' 와 '왜 나는 남의 돈을 힘들게 벌어주고 있는가?'였다. 남겨진 일이 있으면 집에 가서도 생각하는 타입이라, 종종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의도치않게- 자발적으로 선택했다. 그게 그렇게 억울했다. 회사원의 일이란 결국 다른 놈 배불려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이렇게 힘들게 일할 거면 나를 위해 돈을 벌고 싶었다.
일을 한다면, 나를 위해 일하고 싶었다. 유일한 퇴사의 목표가 이거였다. 그래서 프리랜서를 선택했고, 동업을 시작했다. 이 길을 걷기 시작하고 나서야 알았다.
직장은 규칙적인 쉼도 보장하는 곳이구나
쉰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다녔던 전 회사와 그 전 회사는 양애취가 아니어서, 나름의 휴가 체계와 규칙을 갖췄고 그걸 지키려는 사람들이 합당하게 휴가를 쓰고 휴식을 취했다. 안 그런 회사가 수두룩 빽빽하지만, 내가 겪은 회사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규칙적인 쉼을 제공했다. 최소한 몇시부터는 집에 가라는 퇴근 시간과 무슨 요일에 일하고 무슨 요일에는 쉬라는 지침을 통해 쉼의 가이드를 제공했다. 나는 그때 그런 것들이 당연한 줄 알았다.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보니 쉼을 추구하는 게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언제 쉴 것인가, 얼만큼 쉴 것인가가 나의 의지에 달린 거다. 그래서 거의 안, 아니 못 쉬었다. 끊임없이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묘한 압박감과 알 수 없는 부담감이 항상 따라다녀 휴식을 선택하는 게 무섭다. 이제서야 일다운 일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쉰다니, 어림도 없다.
오히려 회사를 다닐 때보다 더 머리가 텅텅 비어가고, 감성이든 이성이든 지식이든 생각이든 간에 무언가가 메말라 간다는 느낌이 강렬했다. 어제보다는 더 나은 오늘의 내가 된다는 거창한 목표에, 나는 역방향으로 달려가는 기분이다. 안되겠다는 위기 의식이 들어서 어제는 일부러 일을 하지 않고 책을 읽었다.
불과 몇달 전만해도 책 한 권쯤은 카페에서 다 읽고 나왔던 거 같은데 지금은 한 권이 뭐야. 한 20페이지 읽으면 졸고 앉아있다. 그간 잠을 잘 못자기도 했거니와, 내 몸이 카페에서 책 읽는다는 행위가 낯설어진 모양이다. 까무룩 졸다가 일어나서 다시 책을 읽고 커피 한 모금 마시고, 그러다가 바깥 풍경에 멍도 때리다 일요일 하루를 보냈다. 집에 오는 길이 얼마나 시원하던지.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맛깔나는 쉼이었다.
몇 번이고 되내이는 말이지만, 나는 내 선택에 후회가 없다. 퇴사한 일도, 프리랜서를 선택한 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선택의 기회비용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건 썩 유쾌하지 않다. 내가 언제 쉬어야 하는지마저 선택하고 신경쓰고 간섭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면 나는 좀더 직장에 오래 몸 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모든 선택들이 사실 꽤나 귀찮거든. 밥 메뉴조차 생각하기 싫어서 급식을 선호하는 인간인데 쉼의 빈도와 강도와 종류를 선택해야 한다니, 원.
쉬는 건 무섭다. 그리고 쉼과 관련된 무언가를 선택하는 건 낯설다. 심지어 대체로 나의 쉼은 돈이 든다. 싫은 일 3종 합체인가....? 커피 한 잔도, 전시회 티켓표도, 영화표도, 맛있는 간식이나 친구들과의 만남도 다 돈이 든다. 여행은 꿈도 안 꾼다. 꿈꾸기 시작하면 내가 답답해지니... 쉼이 이렇게 도망가고 싶은 일이었나.
진짜 쉼에서 도망치니, 다른 데서 쉼을 찾으려고 애쓴다. 직장인 시절엔 아까워하며 주워 쓰던 지하철 자투리 시간을, 요새는 의미없는 유머짤들을 찾아다니는 데 쓴다. 분명 더 좋은 일에, 생산적인 일에 시간을 써야하는데 지하철에 앉자마자 중독마냥 시간을 낭비한다. 차라리 쉴 때 제대로 쉬고 그런 자투리 시간들을 알차게 쓸 것을...
아직 요령이 없는 탓이겠거니 생각하며 집을 나서기 전 책을 가방에 넣었다. 막상 지하철에선 펴지 않을 지라도 시도하는 거다. 혹시 또 모르니까. 지금 일이나 일상 패턴에 익숙해지면 이제 나도 규칙적으로 쉼을 추구하겠지. 양질의 쉼을 위하여 지금부터 연습한다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