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존해주세요 (10) 인생도 레벨업이 될까요?

30대 편집자의 취향 확립 프로젝트

by 선선

게임을 좋아한다. 인생의 변곡점을 겪으며 좋아하는 게임의 장르가 조금씩 달라졌긴 하지만 내게 마음의 고향같은 게임 장르는 역시나 RPG 게임이다.


RPG 게임은 Role-playing Game의 약자로, 말그대로 게임 유저가 게임 속 한 인물이 되어 특정 역할(Role)을 부여받고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게임의 한 유형이다. 보통 게임 안에서 퀘스트나 전투 등을 통해 레벨업(성장)하는 경우 RPG 게임이라고 부른다.


인생에서 처음 접한 RPG 게임이 무엇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한게임과 넷마블을 전전하던 그때의 내 모습은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는 모범생, 집에서는 착한 딸이던 내게 온라인 세상은 일종의 숨 쉴 구멍같은 것이었다. 잘해야한다거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무게나 압박이 없이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공간. 실재하지 않으나 실재하는 듯한 모호한 가상의 공간. 그곳에서 제법 멋져보이는 외형과 무기를 장착한 채 그럴싸한 스킬을 사용하며 레벨업이라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는 내 캐릭터를 볼때면 이 공간이 현실이길 바랐었다.




가장 애정했던 RPG 게임은 '파랜드 택틱스 2'였다. 명절에 들린 큰집에서 사촌오빠가 게임 잡지에서 받았던 파랜드 택틱스 2를 플레이하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캐릭터가 나름의 특징을 담은 기술을 쓰며 몬스터를 무찌르고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이 어린 눈에는 신기해보였다. 나름의 이어지는 스토리도 흥미진진해서 사촌 오빠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니터를 꼭 붙어 지켜봤었다.



그 관심이 갸륵해서였을까? 사촌 오빠는 그 게임 CD를 기꺼이 내게 주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CD를 받아와 컴퓨터에 설치하던 때가 기억난다.



탄광 속 카린 일러스트를 좋아했다.



마지막 엔딩까지 채 다다르지 못한 채 연거푸 처음으로 버튼을 눌러야 했을 때의 기억, 처음으로 엔딩을 보았을 때의 기억, 시험이 끝난 날이면 어김없이 나만의 작은 의식처럼 게임 시작 아이콘을 눌러 하룻밤을 세우며 플레이하던 기억.

그 켜켜이 쌓인 기억 속에서 나는 어느 날은 카린이 되었다가 어느 날은 알이 되었다.


그렇게 초등학생이던 나는 그 이후부터 아주 오랜 기간동안 그 게임을 사랑했다.





온라인 RPG 게임으로는 '대항해시대 온라인'을 가장 애정했다. 흔히 말하는 '현질'도 했다. 학생이던 나는 정액권을 결제할 능력이 안되었고, 그래서 시험을 잘보면 정액권을 결제해달라고 부모님께 부탁했다. 게임하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나를 보며 제법 동기부여가 될꺼라 생각하셨던 부모님은 그 거래를 받아들이셨고 또 나는 그럭저럭 시험을 잘봐서 부모님 돈으로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남의 돈으로 하는 게임에서 나는 캐릭터에 애정을 담아 이름을 붙이고 외형을 설정하고 옷을 입혔다. 그리고 게임 공략을 찾아보면서 심사숙고해 직업을 고르고 능력치를 어떻게 나눌지 고민했다. 그렇게 만들어낸 내 캐릭터가 차근차근 퀘스트를 깨나가며 더 넓은 전장과 바다를 누비면 꼭 내가 한껏 성장한 것만 같았다.




연거푸 시험에 떨어지며 교사가 되겠다던 꿈을 내 손으로 접었을 때, 오래 전 접었던 게임이 생각났다. 현실에선 주어진 퀘스트를 깨는 것도, 레벨에 맞는 몬스터를 잡으며 때에 맞춰 레벨업하는 것도 참 힘들구나. 게임 CD 한 장을 받아와 걱정도 근심도 없이 게임 속 캐릭터들과 던전을 뛰어다니던 그 때의 나는 현실이 더 한 RPG 게임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녹록치 않은 현실 속에서 나는 아직 단 한 칸도 레벨업하지 못한 것만 같다. 그런 오늘의 내게 어린 시절, 그 때 그 게임 속 캐릭터들이 말을 걸어온다.


“힘들 땐 언제든 돌아와. 우린 아직 여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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