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만난 도서관에서 인터뷰한 영상이 소개되었는데 자신의 모습에 아주 만족한 모양이었다. 보통의 아이들은 영상에 나와도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영상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아주 예쁘게 나왔다고 긍정적으로 말해주니 나도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한 친구가 슬그머니 나에게 다가와 머뭇거리며
“저도 인터뷰했는데 인터뷰 영상이 잘렸나봐요.
안나왔어요. 그래서 속상했어요”
"그래.. 속상했겠다..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아볼께. 짱쌤이 미안해. "
이 아이는 반대로 자신의 모습이 안 나왔다고 시무룩해서 부정적인 마음을 말했다. 목소리가 아주 작았거나 주변의 잡음이 많이 들어갔던지, 개인정보 차원에서 영상을 잘라야 되는 상황으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영상이 빠졌나보다. 아이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을 솔직하게 말해주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을 하지 않았다면 혼자서 얼마나 속상했을까? 진심으로 그 아이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아이들은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모와의 소통을 통해서 아이는 소통 방식을 배운다. 태어나서부터는 부모가 자꾸 말을 걸어줌으로써 점차 대화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히게 된다. 이처럼 부모와 아이의 대화는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나 자라면서 아이의 감정을 받아주거나 받아주지 않는 경험을 통해 아이는 부모로부터 소통 방식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부모가 아이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으면 아이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된다. 이때 수용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아이는 아이는 감정표현을 잘 하는 아이로 성장하게 된다. 반대로 부모가 “너 왜 그랬어? 잘못했지?” 라고 이야기도 듣지 않고 꾸짖으면 아이가 ‘잘못했어요“ 라고 하면서도 아이의 마음은 어딘가 불편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으로 남게 된다. 부모가 언제 화를 낼지 모르기 때문에 화를 낼까 봐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이다.
코로나로 2년 동안 학습이 비대면으로 이루어진 관계로 어려움이 없다가 올 해초 등교수업으로 수업방식이 바뀌면서 등교 거부를 하는 아이가 있었다.
새로운 담임교사가 몇 번의 전화와 가정방문으로 대화를 시도하였지만 설득을 하지 못했고 등교일 2/3에 걸려 유급의 위기에 처했다.
학부모는 어떻게든 아이가 졸업하기를 원했지만 아이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까?하는 생각에 도와주고 싶었다.
부모와 아이와 함께 학교에서 만나기로 하였으나 아이를 설득하기 어려웠는지 약속한 날짜가 한참을 지나서야 만날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상담실로 갔더니 엄마와 아이, 상담교사, 교감 선생님과 함께 있었고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음을 풀어주려고 말을 걸어도 도무지 나를 쳐다보지도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계속해서
“교장 선생님 좀 쳐다봐. 교장 선생님이 말씀을 하시잖아.”
그러더니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서 네가 학교를 안 가면 엄마가 감옥가는 거야.” 라며 아이를 계속 윽박지르고 협박을 했다.
아이는 엄마의 말이 익숙한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오늘 어렵게 등교했는데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얼마나 무섭고 두려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 A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어렸을 적 상처 속에서 힘들고 외로울 때 엄마가 따뜻하게 말을 해주고 내 마음을 이해해줬으면 하고 바라지 않았던가?
도대체 무엇이 A의 입을 다물게 하고 무기력하게 했을까?
아이가 등교 거부를 하니 엄마로서 정말 당황하고 화가 났을 것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에게 겁을 주는 심한 말로 학교에 등교하기를 바랬으나 아이 입장에서는 오히려 말문을 닫는 결과를 초래했다.
누구든지 흔하게 하는 실수이다. 부모의 화난 감정의 표현으로 쏟아내는 거친 비난의 말들로 아이들이 상처만 입을 뿐,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착 관계를 배울 때 이미 이야기를 나눴지만 A의 엄마도 자라면서 자신의 부모와의 관계에서 애착 장애로 ‘일방적인 소통 방식’을 강요를 경험함으로써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아이와의 소통의 관계에서 드러난 것이다. 과거의 상처가 무의식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통제가 잘되지 않는다.
가정에서 부모의 일방적인 위협적이고 경고의 말을 자주 들으며 자란 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를 다그치는 부모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위협하는 강도도 더 높아진다.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대화가 계속될수록 아이는 부모에게 더 강한 적개심과 반항심을 갖게 된다. 아이는 점점 부모가 싫어하는 행동으로 부모를 자극하게 되어 부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첫째, 아이를 조용히 지켜보기
강압적인 부모는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거나 강압적인 말로 상처를 준다. 아이와 의견을 조율하고 타협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무기력한 아이를 보면 부모로서 화가 나고 속상하겠지만 아무 말 없이 아이를 잘 관찰해보면서 지켜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아이를 다그치면 다그칠수록 아이의 문제행동이 더욱 악화된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아이가 무엇인가를 요구할 때 웃어주거나 대답을 하는 반응을 하면서 조금씩 단계적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좋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소통을 하고 그런 이야기조차 나누길 싫어한다면 무리하게 말을 걸지 말고 잠자코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괜찮다는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핵심이다. 엄마의 타이밍이 아니라 아이의 타이밍이 중요하다. 아이가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그때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진지하게 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둘째, 명령어보다 권유형의 언어를 사용하기
예능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최수종 부부가 아이들이 어렸을때에 존댓말을 가르치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존대말을 사용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이는 부모가 쓰는 언어를 아이들이 그대로 배워서 사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행동이다.
'해라' 와 '해!'의 말은 권위를 나타내는 언어로 명령하는 말보다 '~~하자', ''~~할래?', '~~하면 어떻겠니?‘의 긍정적인 권유의 말로 바꿔 사용하면 어떨까? 명령으로 지시하는 것보다 훨씬 듣기도 좋고 닫혀 있는 아이의 마음의 문을 여는 좋은 열쇠가 된다.
셋째, 소통하며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기.
여름 방학이 끝나고 A가 학교를 나오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물으니 특별한 일도 없었는데 그냥 학교에 나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침맞이를 하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엄마와 함께 들어오는 A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안녕, 어서와”라고 인사를 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이제부터는 단계적으로 “교문 앞에서 혼자 들어올 수 있도록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한번 이야기를 해보세요.”하고 엄마에게 권했다.
며칠이 지난 후 교문앞에서 혼자 학교에 들어왔다. “이야기할 때 A가 잘 받아드리던가요?” 하고 물었더니 거부감없이 하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아유 잘되었어요..그렇게 단계적으로 학교에 혼자 잘 나와서 적응 할 수 있도록 해보기로 해요. 그리고 잘했다고 격려도 해주시고요”라고 엄마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아이가 등교를 거부하면서 상처를 받았던 엄마와 아이가 대화로 소통하며 조금씩 관계를 회복하고 있다.
지금은 아이가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는 것이 목표이지만 어쩌면 엄마와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고 아이를 이해하면서 더 큰 목표를 이루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