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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래하는 짱쌤 Feb 24. 2022

아버지의 꿈이자 나의 꿈

그리운 아버지


교장 발령 소식과 함께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였다.

나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얼굴이 까맣고 덩치와 손, 발이 모두 커서 어린 시절의 아빠는 커다란 바위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항상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공부를 가르치고 씨름부를 지도했다. 운동을 잘했던 아버지를 닮아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 학교 대표 달리기 선수였다.      



 내가 4학년 때 수원으로 전근을 오셨다. 한 동네에 사는 고학년 오빠들이‘너 어제 숙제 안 하고 놀다가 엄마한테 혼났지? 짓궂게 물으면 입을 삐죽이면서 ‘칫’하고 도망을 치곤 했다. 나는 아버지가 가르치는 수업의 다양한 사례가 되었지만 같은 학교의 교사인 아버지가 내심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다.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아빠처럼 선생님이 되어야지’하는 마음으로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해서 교육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교육대학에서는 뒤늦게 찾게 된 재능으로 공부보다는 늦은 밤까지 한국무용의 매력에 빠져 4년 내내 체육관 지하의 무용실에서 지냈다. 교사로 발령받은 후 우리 집 아이들의 여러 상황을 수업의 사례로 들어가며 아버지를 닮아갔다.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생활 사례는 학생 눈높이에 맞는 훌륭한 수업자료가 되었고 아버지가 이해되었다.      



 연년생인 나와 내 동생이 교육대학에 입학한 것은 아버지의 큰 자랑이었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엄마의 간절한 바람대로 우리 집은‘ 남부러울 것 없는 교육자 집안’이 되었다. 엄마 아빠의 자랑이 된 나와 동생은 아버지가 근무하는 연천의 학교를 찾아갔다. 수원에서 전철을 타고 다시 버스로 갈아타기를 두세 번, 한탄강 이후부터는 차가 없어 지나가는 군용 트럭을 타고 학교까지 들어갔다. 연천은 참으로 멀고 먼 곳이었다. 아버지가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6.25 전쟁 때에도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전해주었다. 

 농사를 지으며 살면서 북한군이 점령하면 북한 주민으로, 남한 땅이 되면 남한 주민으로 지낸다고 하였다. 학교 사택에서 잠을 자는데 밤새 우리나라를 비방하고 북한 체제를 자랑하는 북한방송이 부웅붕 꺼억꺽 소리와 함께 계속 들려왔다. 나와 동생은 처음 겪는 상황이라 너무 무서워 잠도 못 자고 계속 뒤척였는데 아버지는 잘도 주무셨다. 아버지는 주중에는 연천에서 지내시고 매주 토요일 수업이 끝나고 밤늦게 수원 집에 와서 지내다가 월요일 새벽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시곤 했다. 주중에는 혼자서 식사를 준비하여 드셔야 하니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힘든 학교 업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버지의 몸은 점점 축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승진의 꿈을 이루기 위해 멀리 군사 접경지역인 연천으로 가셨지만 결국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셨다.      




꿈을 이어가다    

 

 교장은 아버지의 꿈이었다. 연천에서 2년을 근무하시다가 암 진단을 받으시고 6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현실과 참을성이 많은 아버지는 제대로 된 진료 한번 받지 못하셨다. 


퇴근하고 돌아오실 때 손에 들려있던 과일봉지,

표현은 없었지만 나에게 전해지던 따스한 온기와 아버지의 정(情),

일 년 내내 번갈아 입으셨던 양복 두벌,

방에 누워 외롭게 투병하시던 모습,


아버지는 좋아하는 음식을 드시고 토하기를 반복하셨다. 

크고 건장하던 몸이 점점 앙상하게 말라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 오후에 아이들을 보내고 오랫동안 숨죽여 울었다. 아버지가 너무 그립고 보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내가 교장이 돼서 아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였으나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지는 정신없는 생활에 한참을 잊고 살았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새로 옮긴 화성에서는 교사들이 모이면 주로 승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수업과 업무 이외에 무엇인가를 하면서 퇴근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수업이 끝나면 교실에서 교재 연구와 칼퇴근하는 대도시 수원과는 교사 마인드와 교육 환경이 달랐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나의 인생도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이자 나의 꿈이던 교장에 대한 강한 열망이 생겼다. 

교장이 되기 위해서는 경력평정, 연수 평정, 가산점을 확보해야 하고 오랜 기간 노력과 희생이 크기 때문에 상당한 고민이 필요했다.     

‘한번 도전해봐요.’

 남편의 격려로 본격적으로 승진 준비를 하기로 결정했다. 농어촌 근무 가산점이 있는 6 학급 규모의 작은 시골 학교로 옮겼고 집도 학교 옆으로 이사했다. 교장이 되기 위한 첫 시작 이었다.  

아버지의 꿈인 교장이 나의 꿈이 되면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고 칙칙폭폭! 요란한 기적을 울리며 달리는 승진 기차에 나도 몸을 실었다. 


<나는 초보 교장입니다> P20~25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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