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만약 내가 ○○○ 한다면 아빠는 어떨거 같아요?"
”‘만약’이라는 말을 왜 사용하노? 일어나지 않은 것에 힘 빼지 마라."
평소와는 다른 아버지의 단호한 어조에 J는 당황했었다. 그냥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굳이 저렇게 딱 잘라서 말씀하실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만약‘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희망인지 J는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만약‘은 없다. 그냥 선택하면 그것이 정답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J는 ‘만약’이라는 말만큼 ‘당연히’라는 말을 싫어했다.
“세상에 당연한게 어딨어?”
가족이라서, 연인이라서, 친구라서, ‘당연히’ 무언가를 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세상엔 너무나 많았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했던가? 처음엔 할 수 있어서 했던 많은 일들이 어느새 ‘당연히’ J가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왜 계속 본인이 해야 되냐고 따지기라도 하면, 이제껏 잘 해왔으면서 별스럽게 군다고, 그거 조금 한다고 생색내는 거냐고 불평불만이 쏟아졌다.
‘왜 이렇게 정도를 지키는 사람이 없지?’ ‘사람이라면 염치를 알아야 되는 게 아닌가?’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하고 모든 걸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너무 멀리 와서 되돌릴 수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화가 나고, 억울해도 J가 안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두 번, 그런 일을 겪고나자 점점 인간관계에 회의가 생겼다. 지나치게 활달하고, 지나치게 친절한 사람들은 괜히 거북했다. 그냥 J가 베푼 만큼만 돌려주는 사람들이 좋았다. 가끔 외롭다는 생각도 했지만, 인간관계로 인한 피로감보다 차라리 혼자인 게 더 편했다.
지난 1월 업무가 바뀌고 가장 많은 들은 말이 ‘그 자리는 원래 그래. 전임자들도 다 참고 일했어.’였다. 물론 지난 담당자가 바보라서 가만히 있은 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사람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었는데 왜 꼭 이전과 똑같이 해야 되는 걸까? J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문을 제기하는 J가 도리어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고, J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서로 이해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이해를 바랄까?’, ‘그냥 포기하는 게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J님, 많이 힘드시죠? 고생많으세요!"
엥? 전혀 교차점이 없는 타과의 직원이 뜬금없이 사내 매신저로 위로를 한다. 오다가다 얼굴은 알고 있지만 한번도 같이 업무를 해 본적이 없는 직원이었다. 알고보니 우리 과에 업무 협조 요청하러 왔다가 과장님께 혼쭐이 나고 갔단다. 나름의 이유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조금만 참으시지!
이 넓은 세상에 자신을 이해하는 한 명이 있다는 데서 위로를 받아서였을까? J의 명치에 막혀있던 고구마 몇 개가 쑥하니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콧노래가 나왔다.
'그래, 한 사람이면 돼. 단 한 사람만 내 마음을 알아주면, 이겨낼 수 있어!'
이 말을 속으로 되뇌이며 J는 밀린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