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읽고

by 조카사랑

슈테판 츠바이크? 처음 알게된 작가였다. 책은 그 사람의 경험을 나타낸다고 했다. 책 제목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만 봐도 뭔가 어두운 시기를 살아야했던 작가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책을 펼치기 전 작가의 이력이 궁금해졌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나치시대를 살았던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극작가, 저널리스트로 영국, 미국, 브라질로 망명생활을 해야했다. 유대인으로서 작가가 겪어야할 삶의 고뇌가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작가 빅터 프랭클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내 손이 무거워졌다.


<걱정 없이 사는 기술>, <필요한 건 오직 용기뿐>, <나에게 돈이란>, <센강의 낚시꾼> 등 소제목이 하나씩 끝날때마다 생각했다. '아~ 이 책은 한번에 마무리될 후기가 아니구나!' 각 장마다 할 얘기들이 있었다. 사람사는 것은 다 똑같다고 했던가? 각자의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지만 나또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들이 포스트잇에 적혀 책에 부피를 더했다.


돈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일했기에 모두가 그를 존경했다. - <걱정 없이 사는 기술> 중에서


'순수하다'라는 말이 어느 때부터인가 부정적인 의미가 더해졌다. '호구' 또는 '바보'라는 말대신 '순수'라는 어휘로 대신했다. 하지만 듣는 사람조차 '순수'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적힌 대로 받아들이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그나마 <걱정 없이 사는 기술>의 안톤은 그의 순수함을 받아들여주고 이해해주는 사람들 속에서 살게 되어서 행운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들었다.


내가 어린 시절 살던 동네는 정말 시골 촌구석이었다. 우리 집은 대문도 없었다. 옛날 시골집이 그렇듯 방문을 열면 우리집 마당과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바로 보였다. 심심하면 방문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기도 했다. 한번씩 낯선 사람들이 밥 좀 얻어 먹을 수 있냐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런 경우 열에 아홉은 밥을 챙겨줬었다. 물론 아무리 내가 그리워한들 다시는 오지 않을 시절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그리운 지도 모르겠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 마르틴 니뮐러 -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침묵, 뚫을 수 없는 침묵, 끝없는 침묵, 끔찍한 침묵,

나는 그 침묵을 밤에도 낮에도 듣는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로 내 귀와 영혼을 가득 채운다.

그것은 어떤 소음보다 견기기 힘들고, 천둥보다,

사이렌의 울부짖음보다, 폭발음보다 더 끔직하다. - <거대한 침묵> 중에서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권리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는 말할 수 있는 권리조차 없었다. 공포정치가 만연한 세상에서 말 한마다는 고사하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을 것이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작가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해서 그럴까? 책 전체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작가의 무기력감이 깔려 있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했다. 지금 전세계를 돌아보면 자국의 이익을 중시하고,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 하고있다. 세상이 전체주의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공산주의가 아니다. 개인(소수)의 존엄성이 무너진 사회! 세상에 정답은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가장 무서운 것이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작금의 시대가 그때로 회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지 한번쯤 고민해봐야겠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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