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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중 달리기 제일 좋은 날은?

서울어스마라톤 중계를 보다

by 햇살 드는 방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하다. 어젯밤에는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나갔다가 나도 모르게 "어유, 추워."라는 말을 내뱉고는 화들짝 놀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대체 이 더위는 언제쯤 끝나는 거냐고, 10월까지 덥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 같은 더위를 향해 원망의 말들을 쏟아내기 바빴었는데. 언제 이렇게 바람의 온도가 달라진 걸까.


연일 폭염경보가 울려대던 한 여름에 딸의 인스타에 자꾸만 러닝 인증이 올라오자 보다 못한 친정엄마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 "이렇게 더운 날에도 달리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니?" 잔소리하는 것 같을까 봐 며칠을 참았다 전화하신 엄마께 "하나도 안 더워요! 그늘은 시원해요!"라고 답하며, 나는 연신 손으로 벌겋게 익은 얼굴을 부채질하고 있었지.


덥긴 덥더라, 한여름의 러닝은.

이 더위가 가시고 시원한 바람 부는 가을이 오면 얼마나 달리기 좋을까. 찬 바람 가르며 힘차게 달릴 겨울 러닝은 또 어떻고. 연분홍 벚꽃 가득 날리는 천변을 달릴 땐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환상적일까. 아직 달리기의 계절은 여름 밖에 모르는 나는 늘 궁금했다. 언제가, 과연 어느 계절이 달리기에 가장 좋을까? 1년 365일 중 언제가 달리기 제일 좋은 날일까?


일요일 아침, 지인의 출전 소식에 졸린 눈을 비비며 틀어놓은 <서울 어스마라톤> 중계석에서 궁금했던 질문의 답을 들었다. 중계가 종료되던 무렵 아나운서는 마무리 멘트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1년 365일 중에 달리기 제일 좋은 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그래. 왜 아니겠는가. 달리기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달리기 제일 좋은 날은 특별한 어떤 날이 아닌 내가 달리고 있는 바로 오늘인 것이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궂으면 궂은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시간이 이르면 이른 대로, 늦으면 늦는 대로...... 각자의 상황에 맞게, 컨디션과 스타일에 맞게 그저 뛸 수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제일 좋은 날이고, 가장 좋은 때인 것이다. 그 마음을 나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짧게라도 달리고 들어온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편안하고 즐겁다는 걸 하루하루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어스마라톤> 중계 화면 속 사람들은 하나 같이 밝은 미소로 웃고 있었다. 누군가는 사서 고생이라 말하는 장거리 달리기를 하면서 다들 어쩜 저렇게 행복해 보일까. 누가 억지로 시켜서 뛰는 거라면 일확천금을 준다 한들 저렇게 웃으며 달릴 수는 없을 것이다. 좋아서, 행복해서, 스스로가 원해서 기꺼이 달리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충만한 미소가 건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늦잠이 제일 간절하고 달콤한 주말 아침에 포근한 침대를 박차고 단단한 아스팔트 바닥을 달리러 나온 사람들. 쌍둥이 딸을 태운 유모차를 끌고 달리는 아빠, 나란히 발걸음 맞춰 달리는 다정한 커플, 기록 달성을 목표로 진지하게 달리는 열정의 마라토너, 인생 첫 마라톤 출전에 마냥 벅차고 들뜬 참가자, 앙증맞은 두 팔을 씩씩하게 흔들며 힘차게 달리는 꼬마 러너, 탄탄한 근육과 자신만만한 표정이 그동안의 운동 연륜을 보여주는 실버 선수, 가족들과 삼삼 오오 대화도 나누며 걸었다, 뛰었다 여유롭게 코스를 즐기는 사람들.


연령대도 출전 동기와 목표도 다 다른 이들이지만 그들 모두에게 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달릴 수 있어 행복해!"라는 마음 아닐까? 기록이나 등수와는 상관없이, 달리는 순간순간 마주했던 바람과 햇살과 풍경이 그리고 끝까지 완주했다는 성취감이 그들에게 똑같이 커다란 행복을 선물했을 것이다.



사실 대회 종료 후 인터넷에서 들려온 <2025 서울 어스마라톤>의 후기는 참담했다. '기후 위기와 자연 보전의 중요성을 알리는 마라톤'이라는 슬로건이 무색하게 쓰레기가 가득했다. 3만 명이 넘는 참가자가 모이는 대회였음에도 운영은 5천 명 규모의 대회에도 못 미쳤다. 물품 보관소 운영과 관리가 엉망이어서 어스 마라톤이 아니라 '내 짐 어디쓰? 마라톤'이었다. 내 인생 최악의 마라톤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고 출발 시간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병목 현상이 심했으며, 공식 기록에도 오차가 많아 억울한 사람이 속출했다...... 등등. 누군지도 모를 담당자와 책임자의 직장 내 안위가 걱정될 정도로 안타까운 후기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어제 내가 본 중계화면 속 사람들은 분명 즐겁게, 행복하게 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과정에서 불편함이나 아쉬움은 있었을지언정, 달리는 시간만은 불평불만이 아닌 웃음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였으리라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너들에게 1년 중 달리기 제일 좋은 날은 언제나 '오늘'이기 때문에. <2025 서울 어스마라톤>에서 달린 모든 러너들에게도 어제, 2025년 9월 21일 역시도 달리기 제일 좋은 날이었기를 바란다.


이번 주 금요일, 내 인생 첫 마라톤 대회가 되줄지 모를 <2025 Save Race> (일명 카뱅 마라톤)의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경쟁률이 어마어마할 듯하여 마음을 비우고 있긴 하지만, 친한 동생들과 의기투합하여 신청한 대회이니만큼 당첨의 행운이 찾아와 주기를 바라고 있다.(춘식이 굿즈가 너무나 탐나는 건 안 비밀)

<2025 Save Race>가 나의 인생 첫 마라톤 대회가 될 수 있을까?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와 무관하게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달릴 것이다. 1년 중에 달리기 제일 좋은 날은 언제나 오늘, 바로 지금이니까.


*표지 사진 출처: BBC 뉴스





<오늘의 운동 기록>
- 오늘은 9시 반 퇴근 후 달리러 나갈 예정입니다. 시간이 늦어 오래 뛰진 못하겠지만 오늘의 기쁨을 채운 후 인증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퇴근러닝 #밤러닝 #개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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