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제 할 결심

빼기보다 더하기

by 햇살 드는 방

변화는 우연으로부터 왔다. 전날 가족 송년회 겸 자체 카운트다운의 여파로 느지막이 일어난 2026년 첫 아침, 아직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며 습관적으로 찬장문을 열었다. 커피를 향해 이동하던 나의 손이 멈칫했다. 커피 코너 바로 옆에 빼곡히 놓인 각종 영양제들에 눈길이 닿았기 때문이다. 정말 우연히, 그날따라 그 알록달록한 상자들이 내게 손짓을 했다. “나 좀 그만 숨겨두고 꺼내줘요. “


언젠가 선물 받고 두어 번 먹고 만 비타민,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는 광고에 혹해서 큰맘 먹고 구입한 유산균, 눈 건강에 신경 쓰자며 신랑이 가져온 루테인… 먹을 땐 못 느껴도 먹다가 안 먹으면 그 효과가 바로 느껴진다는 각종 영양제들. 한 번도 꾸준히 챙겨 먹어본 적 없기에 그 효과 또한 실감해 본 적 없는 나는 영양제의 존재조차 잊고 지냈던 듯하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가늠조차 안 되는 각종 약병과 상자들의 존재가 나의 그간의 무관심을 증명해 준다.


늘 무심코 보고 넘기던 영양제 동굴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손을 뻗게 한 동력은 어쩌면 한 살 더 무거워진 나이일지 모른다. 만 나이에 영 익숙해지지 못하는 나는 내년이면 앞자리를 기어코 바꾸고 말 ‘9’ 자를 달았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조급해진 모양이다. 그래, 아끼다 똥 된다는데 저 많은 건강제품들을 똥으로 만들 순 없지. 열심히 먹어서 금으로 만들어 보자. 그렇게 다짐하곤 손을 뻗어 영양제를 하나 둘 꺼내는 내 표정은 사뭇 진지하고 비장하기까지 했으리라.

비타민, 유산균, 루테인, 초유단백질. 그리고 또 뭘 챙겨먹어야 하지?


이왕 안 먹던 영양제를 챙겨보기로 한 김에 신랑 건강도 조금 더 신경 써 보기로 한다. 나만큼 영양제에 무관심한 사람이기에 챙겨 먹으라고 강요하기 전에 스스로 챙겨 먹을 리 만무하니까. 나 혼자 건강해지는 건 반칙이지. 작은 종지 두 개를 꺼내 나와 신랑 약을 골고루 담아본다. 내친김에 한동안 붐이 일어 너도 나도 아침마다 소주잔 원샷하게 만들었던 올리브 오일과 레몬즙도 꺼내본다. 그러고 보니 집에 재료가 다 있었는데도 여태 그 유명하다는 ‘올레샷’도 한 잔 안 만들어 먹었었네. 피부도 좋아지고, 속도 편해진다던데 나에게도 말로만 듣던 그 효능이 나타나주길 기대하며 소주잔 가득 레몬즙과 올리브 오일을 채워본다.


결심이 힘을 잃고 작심삼일이 될까 봐 일단 브런치에 소문부터 내고 본다. 인스타 스토리에도 인증샷을 올려야 할까 보다. 뭐 하면 일단 티부터 내고 시작하는 이 버릇, 한 살 더 먹고도 그대로네. 매일매일, 꼬박 꼬박은 내가 제일 어려워하는 것 중에 하나인데 새해 첫날부터 스스로에게 미션을 주고야 말았다. 아무도 안 시켰는데 혼자 미션 부여하고 쪼임 당하는 버릇도 여전하구먼.


새해 첫 결심은 ‘약 먹을 결심’. 말이 좀 이상하니 정정하자면 2026년 맞이 첫 다짐은 ‘매일 영양제 챙겨 먹기’다. 빵 끊기, 식후 달달이 안 먹기, 맥주 끊기, 커피 안 먹기…. ‘OO 하지 않기‘가 아닌 ’OO 하기‘의 결심이어서 그럴까. 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샘솟는다. 빵을 끊으려는 것도, 영양제를 먹어보려는 것도 결국은 내 몸을 챙기려는 마음의 표현이다. 건강에 좋지 않은 걸 억지로 끊는다는 생각 대신 몸에 좋은 것을 채우며 하루를 시작하자는 다짐이 좀 더 마음에 든다.


올 한 해는 그렇게 보내보고 싶다. 나쁜 걸 힘겹게 뺄 생각보다는 좋은 걸 즐겁게 채울 궁리를 하며. 내가 가지지 못한 부족함 보다는 내게 이미 주어진 많은 것들에 감사하며. 바꿀 수 없는 지난날의 결과보다는 지금 내 앞에 놓인 현실에 집중하며. 욕심부리다 보니 하나, 둘 늘어난 영양제를 한입에 삼킬 자신이 없어 조금씩 나누어 먹으며 과하지 않게 채워가기 위한 현명함에 대해 생각하는 2026년 두 번째 아침이다.

일단 영양제 먹기 이틀째, 성공적:)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