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2. Billy Joel - Vienna
/ 너무 빠른 세상을 살고 있다.
트렌드를 좇아 고객의 마음과 시선을 얻어야 하는 마케터로, 이 세계를 부지런히 살아내야 하는 한 개인으로서 가끔 이 세계의 호흡과 템포가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봐야 하고 해야 하는 것이 24시간 1분 1초를 차지하고 있으니 나의 감상은 갈수록 짧아지고, 요약되고, 끝내 사진 한 장으로 압축되어버린다.
그동안 긴 글을 쓰고 살지 않았다. 중고등학생 독후감 과제, 학부 시절의 서술형 시험. 그 이후에 온전히 글로 A4 용지 이상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어본 적이 있던가. 손에 꼽을 만큼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의 감상은 빠르게 넘어가는 인스타그램 피드처럼 갈수록 짧아지고 생각의 길이도 짧아진다. 넉넉한 사유의 시간이 주어져도 하나의 생각을 길게 하기 힘들어진다는 이야기다. 1을 생각하다가 바로 2로 넘어간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도 1의 주제가 길어지면 답답하다.
새로운 곳에서 일을 시작하며 커리어 개발에 힘써야 하는 동시에, '벼락 거지'가 되지 않기 위해 남들 다 한다는 공모주와 주식, 부동산의 대한 뉴스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최근엔 NFT와 메타버스가 추가됐다.) 성격 유형 검사를 통해 29년을 동거해도 감이 잘 안 잡히는 나 자신을 부지런히 파악하고 장점은 더 강하게, 단점은 더 개발해야 한다. 그저 이유 없이 좋아하는 취향만을 좇다가 언제 맞을지 모르는 벼락을 피하기 위해, 누구나 노력만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희미한 부의 '추월차선'을 위해 달린다. 봐야하는 것들은 끝을 모르고 차곡 차곡 쌓이고, 00만 조회수는 우스워진다. "너 빼고 이거 다 보고 있어"라고 계속 외치는 친절한 알고리즘 속에 또 빠져들고,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의 북마크 기능에는 용량 제한이 없음에 감사하게 된다.
언젠가 '지대넓얕',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책이 유명했다. 갈수록 대화 주제는 어려워지는데, 무궁한 고품격 대화 핵심을 책 한 권으로 습득할 수 있다니. 당장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볼 것이 많아서 결국 그 책조차 읽지 못했다.) 깊게 깊게 파고들기보단 다양하고 얕은 관심을 추구하는 나의 템포에도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잠시 숨을 멈추고 생각하게 된다. 이게 맞는 걸까?
참을성의 호흡이 짧아지면서 무서워지는 것이 몇가지 있는데,
- 좋은 것을 봐도 좋다고 느낄 수 없어지는 것. 다음 좋은 것이 또 나를 기다리니까.
- 혹은 재테크 책을 읽느라 주변 사람의 호의에 감사함을 표할 타이밍을 놓치는 것.
- 운명적으로 만난 좋은 음악과 작품에 '감상'이 갈수록 짧아지고, 깊은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
실제로 이런 순간은 생각보다 잦게 찾아 왔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2020년 중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회사를 잠시 쉴 때 온전히 하루를 책 한 권과 보낸 때였다. 햇빛 쬐는 창문 아래, 고향집 침대에 반쯤 누워서 한참을 책장을 넘기는 행동만 반복했다. 다 읽은 후엔 여기저기 접어두었던 책장을 다시 따라 다니며 좋은 책이 주는 여운을 한껏 누렸다. 어떻게 알랭드 보통은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을까? 섬세하고 통찰력있는 문장들은 감정에 어리숙했던 나에게도 사랑이 어떤 느낌인지 어렴풋 느껴지게 했다.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쫓기지 않고 내 감정을 되새김질할 수 있었던 시간. 나는 성격도 급하고 얕게 다양한 것을 다 알아야 하는 사람이지만, 역으로 기억에 남는 행복한 순간은 무언가를 진하게, 짙게 느낀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걷고, 글을 쓰기로 했다.
2020년의 그때와 완전 같을 수는 없겠지만, 눈과 손이 바쁜 일상 중 가끔은 의식적으로 세상과 한발짝 멀어져 보기로 했다. 메모장에 남겨둔 한 토막의 생각과 사유를 주워다가 조금 더 긴 시간을 보내거나, 가끔은 아무 계획 없이 하루의 휴가를 쓰기도 하고. 목적이 있어야 몸을 움직여지는 사람이지만, 고요한 산책도 가끔 즐기면서. 평소 글을 쓰던 사람도 아니고, 외부와 연결을 끊고 오로지 걷는 순간에 집중하는 산책길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조금은 힘주어 누군가를 따라가던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럼에도 내일이면 트렌드와 유행을 놓치지 않기 위해 새로운 뉴스레터에 구독하기 버튼을 누르고, 출근길에는 자는 동안 놓친 세상 소식을 섭렵하기 위해 팟캐스트를 들을 것이다. 일부의 관심과 취향은 내가 선택했다기 보다 거대한 미디어의 힘에 의해 선택될 것이다.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잠시 멈추어 나만의 생각과 사유를 할 수 있도록, 잠시 멈춤 신호를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나만의 장치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Where’s the fire, what’s the hurry about?
어디 불이라도 났어? 왜 그리 서둘러?
You’d better cool it off before you burn it out
모든 게 불타버리기 전에 조금 식혀보는 게 어때?
You’ve got so much to do and
네겐 할 일이 정말 많겠지만
Only so many hours in a day
하루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거든
...
Slow down you doing fine
잠시만 쉬어가자, 넌 잘하고 있으니까
You can’t be everything you want to be before your time
죽기 전에 네가 원하는 걸 다 이룰 수는 없는 거야
Although it’s so romantic on the borderline tonight Tonight
밤과 새벽 사이의 경계선이 참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안녕하세요! 올해 '수플레'에 처음 함께하게 된 영선입니다.
글 속에서 말한 것처럼 긴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은 저지만, 음악과 함께 저의 생각이 담긴 글을 나누고 싶어서 합류하게 되었어요. 지친 저녁에 우연히 알게 된 'Billy Joel - Vienna'의 노래를 듣고 많은 위로를 받았네요. 노래를 들으며 글감을 선정한 건 아니지만, 요즘 제 머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생각과 노래가 잘 어울려서 같이 소개합니다. 가벼운 글은 아니지만 잔잔한 저녁에, 모두의 시간에 위로가 되는 한 편의 노래와 글이었기를 바래요.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 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 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