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해외여행을 간다는 건
여행이라 쓰고 고행이라고 읽는다.
여행 사흘 째 밤.
맥주 한 캔을 따서 호텔 방에 놓인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날은 영국박물관에 갔다가 코벤트 가든에서 점심을 먹고 웨스트민스터에 들러 다시 사우스뱅크 센터에서 저녁을 먹고 빅벤과 런던아이에 불이 켜질 때쯤 호텔로 돌아왔다.
종아리가 욱신 거렸다. 오늘도 2만보쯤 걸었겠구나.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맥주잔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물이 흘렀다.
맥주잔 너머에 앉은 남편을 쏘아봤다.
"앞으로 해. 외. 여. 행은 입 밖에도 꺼내지 마."
골프나 낚시, 게임 같은 걸 하진 않는다.
술자리를 좋아한다거나 모임이 잦은 것도 아니다.
회사-집-회사-집 하는 '집돌이' 남편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
그건 바로 여행이다. 특히 해외여행.
내가 사대주의자라고 놀릴 정도로 남편은 외국 문화를 좋아한다.
아이가 4살일 때부터 거의 매년 외국에 다녀왔다.
괌, 말레이시아, LA, 런던, 비엔나, 싱가포르 다시 런던.
혼자 여행하는 걸 좋아하는 나로선 가족 여행이 늘 부담스럽다.
우선 호텔을 정하는 것부터 까다롭다.
한식을 꼭 먹어야 하는 아이 탓에 작은 주방이라도 딸려있어야 하고,
시내에서 멀어서도 안되며, 쾌적한 분위기까지 보장되면서 가격은 싸야 한다.
호텔이 정해지면 일정을 짜야한다.
꼭 가봐야 할 곳을 중심으로 아이의 체력과 관심사를 반영한 곳까지 섞는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미 방전된 상태로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준비야 그렇다 쳐도, 가족끼리 여행을 하면 자유가 없는 게 제일 고역이다.
마음껏 헤매고 실수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평상시에는 꼼꼼히 계획을 세우는 편이지만, 여행에서만큼은 일정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다.
길을 잃어 낯선 곳에 도착해도 새로운 풍경을 즐길 수 있고,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도 있어야 한다.
그런 여유가 여행의 특권 아닌가?
하지만 가족, 특히 아이와 함께라면 불가능하다.
때때마다 먹이고 돌보고 챙겨야 할 어린 동반자가 있으니 헤매서도 안되고 실수해서도 안된다.
얼마 전 연령별 '버킷리스트'에 관한 유튜브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어린아이들부터 노년기에 접어든 어른들까지. 저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신기하게도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절반쯤은 '해외여행'을 꼽았다.
우스갯소리로 젊을 땐 시간은 있지만 돈이 없고,
나이가 들면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다고 한다.
여행, 특히 해외여행은 시간도 있고 돈도 있어야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실천하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희망 사항이 되는 걸까.
어쩌면 그들에게 해외여행이 싫다고 부르짖는 건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진첩을 들춰보면 알 것이다.
어린 시절 가족 여행에서 찍은 사진 속의 엄마와 환갑을 넘겨 친구들과 떠난 여행에서의 엄마가 얼마나 온도 차이가 심한지.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엄마를 무엇이 그토록 웃게 했는지.
"런던 가서 너무너무 좋았겠다."라고 말하는 친구한테
"나 진짜 궁금한데, 너는 너네 집 애들하고 여행 가면 너무너무 좋아?"라고 물으니 친구가 딴소리를 했다.
"그래 그래, 애들 다 키워놓고 우리끼리 여행 가자. 런던 가자. 런던."
우리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핫핑크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채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런던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도 안된 어느 날 밤.
남편이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년에는 파리에 가고 싶다고.
(내가 분명 해외여행은 입밖에도 꺼내지 말라했거늘!!!)
기억상실에 걸린 사람처럼 파리 타령을 하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사실 '해외여행 싫다'고 큰소리쳤지만 나도 장담할 수 없다. 또다시 남편한테 홀려 비행기에 탈지도 모른다.
내가 변덕스러운 게 아니다. 이게 다 시간 탓이다.
시간이 힘든 기억을 휘발시키고 좋은 추억만 남겨서 그렇다.
여행 가서 말 안 듣고 고집부리던 아이와 대책 없이 'GO!'를 외치던 남편은 어느새 희미해졌다.
기억을 상실한 나는 내년 이맘때쯤 어정쩡한 표정으로 에펠탑 앞에 서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