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즐거움을 알면 한글은 저절로 익힌다
"엄마 여기다 내 이름 쓴 거야?"
아이가 처음 유치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나는 새로 받은 가방에 이름을 쓰고 있었다. 아이가 목을 쭉 빼고 구경을 하기에 "너도 한번 써보라"면서 흰 종이를 내밀었다. 아이는 자기 이름을 따라 '그렸다'. 삐뚤빼뚤. 연필을 꼭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올바르게 선 하나 긋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재밌는지 아이는 지렁이처럼 구불거리는 이름을 보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마침 잘됐다 싶어서 자석칠판 앞에 아이를 데려갔다.
"여기다가 실컷 써봐~!"
아이 이름을 커다랗게 써주고 주방으로 달아났다. 한참 동안 자기 이름을 그리며 놀던 아이가 "엄마, 엄마!" 급하게 나를 불렀다. 아이가 활짝 웃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나 이제 내 이름 혼자 쓸 수 있어! 봤지? 봤지? 그런데 엄마 이름은 어떻게 써?"
대부분 아이들은 낱말 카드로 한글 단어를 익히기 시작한다. 학습지 선생님이 와서 한글 공부를 도와주는 경우도 많다. 나도 처음엔 당연히 낱말 카드나 '한글이 야호' 같은 영상물로 한글을 떼야하는 줄 알았다. 서점에 가서 '기적의 한글 학습' 세트를 들었다 놨다 몇 번이나 고민했었다. 그런데 아이가 이름 쓰기를 재밌어하니 그냥 아이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율이의 한글 학습 도구는 영상물도, 학습지도 아닌 포스트잇이었다. 5세 때 처음 자기 이름을 쓴 뒤로, 나는 아이가 쓰고 싶다는 것부터 가르쳐줬다. 가방, 나비, 다리미 순서대로 한글 카드를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식탁, 화장실, 소파 등 아이가 궁금해하는 단어를 포스트잇에 쓰고, 해당되는 사물에 붙이면서 놀았다.
어느 날 율이가 "엄마에 있는 동그라미(ㅇ)는 아빠한테도 있구나!"하고 말했다. 자음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 후에도 ㄱ,ㄴ,ㄷ이 자음이고 ㅏ,ㅑ,ㅓ가 모음이라는 건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알고 싶다는 단어를 알려주기만 하고 아이는 마음껏 썼다. 그렇게 1년여를 보냈다.
아이가 6살이 되어서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매일 유치원에 가져가는 급식판에 '사랑해' '고마워' '보고 싶어' 같은 짧은 글을 써서 포스트잇에 붙였다. 아이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편지를 한참 바라보고, 집에 와서 나에게 뜻을 물었다. 내가 읽어주면 아이는 뛸 듯이 기뻐하며 따라 썼다. 점심시간 동안 편지를 눈에 담아둬서인지 금방 외워서 썼다.
아이가 한글을 배우는 동안 무얼 어떻게 쓰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쓰기' 자체의 즐거움을 방해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아이가 맞춤법을 틀려도, 글씨를 삐뚤게 써도 그냥 뒀다. 친정에 갔을 때 엄마가 "율아 '닥'이 아니고 '닭'이야!"라고 지적하시길래 조용히 손사래를 쳤다. 닥이든 닭이든 아이가 쓰고 싶은 대로 쓰고, 맞춤법은 학교에서 배워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맞춤법을 틀릴 까 봐 조마조마해하거나 글씨를 예쁘게 쓰려다가 진이 빠지는 게 더 나쁘지 않을까. 그저 '쓰고 싶은 마음'을 다치지 않게, 글이 가진 힘을 스스로 깨닫게 기다려줬다.
포스트잇 편지가 계속되면서 아이는 자연스레 짧은 문장을 이해하는 수준이 되었다. 포스트잇에 적힌 단어가 긴 문장으로 바뀔 동안 혼자서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6개월여 만에 아이가 그동안 배운 한글로 편지를 써왔다. 내가 식판에 붙여둔 포스트잇 편지 옆에 '엄마 사랑해'라고 쓴 답장이 붙어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처음 쓴 편지가 '엄마 사랑해'라니. 그 사실이 감격스러워 포스트잇에 쓰인 글자를 가만히 더듬어 봤다. 아이의 온기가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그해 가을 유치원에 상담을 하러 갔다. 선생님께서 먼저 포스트잇 이야기를 꺼내셨다. 아이들과 식사를 하며 내 편지를 읽어봤다고 하셨다.
"율이가 한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하면 재밌게 배울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결국 자기가 활용을 할 수 있어야 배우고 싶은 욕심이 생길 것 같아서 편지를 써주기 시작했고요. 뭐라고 적혀있는 줄 몰라서 답답해할 줄 알았는데 비밀편지 받는 것처럼 즐거워하더라고요."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다른 학부모님들께 한글 공부 방법으로 소개해 드려야겠다"며 칭찬해주셨다. 유치원에 상담하러 와서 한글 떼기로 고민하는 학부모가 많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실제로 아이가 대여섯 살 때 친구 엄마들은 놀이터에 모이면 '한글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로 고민했다. 그리고 꽤 많은 아이들이 한글 학습지를 선택했다. 엄마랑 공부하다가 힘들어서 결국 선생님한테 맡겼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아이들이 가장 먼저 하는 사교육이 바로 한글 교육인 셈이다.
아이가 처음 시작하는 '공부'가 한글이라면, 나는 그걸 사교육으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오래 걸려도 아이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다. 스스로 한글을 떼면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할 때도 그 자신감이 토양이 될 것 같았다.
여섯 살 때쯤, 색종이에 한가득 편지를 써온 아이에게 물었다.
"우와 누가 이렇게 글자를 많이 가르쳐줬어?"
아이는 씩 웃으며 답했다.
"나 혼자 스스로 배웠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얄밉지 않은 거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고슴도치 엄마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