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무관심으로 아이 편식 고치기
"한 그릇 더 주세요!"라는 소리가 듣고 싶다면
율이는 '할머니' 입맛이다. 얼갈이 배춧국, 시래기나물, 콩비지 찌개를 좋아한다.
"엄마 나는 맨날 맨날 콩비지찌개만 먹고살았으면 좋겠어!"
한입 가득 콩비지를 떠 넣고 오물오물 씹던 아이가 씩 웃는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단다. 고깃집에 가면 고기에다가 김치 올리고, 상추에 싸 먹는다. 한 쌈 싸 넣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자기야, 누가 쟤 보고 편식 심했다고 하면 믿겠어? 씻은 김치도 안 먹던 앤 데."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안 먹는 음식이 많아서 외식하면 맨날 우동에 돈까스만 먹었잖아."
이유식 할 때만 해도 아이는 가리는 것이 없었다. 뭐든 주는 대로 먹는 편이었다. 13개월 동안 완모를 했지만, 모유가 부족했다. 분유를 주면 고문당하는 독립운동가처럼 버티는 탓에 이유식을 서둘러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배가 고팠던지, 아이는 첫 이유식도 거부감 없이 먹었다. 이유식 하는 동안은 한 그릇씩 뚝딱 비워내 보람을 느끼게 하는 아이였다.
돌이 지나고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이상하게 잘 먹던 이유식을 거부했다. 주위에서 "밥을 주면 잘 먹는다"라고 했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평소에 잘 먹던 채소도 안 먹겠다고 밀어냈다.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아이는 온갖 종류의 국수만 좋아했다. 칼국수, 잔치국수, 쌀국수, 우동.... 국수 마니아였다. 칼국수에 들어있는 애호박도, 잔치국수에 띄워진 당근도 모두 골라냈다. 파 조각이라도 보이면 바퀴벌레라도 나온 것처럼 안 먹겠다고 버텼다.
율이와 한참 밥상에서 실랑이를 이어가던 어느 날,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프로그램에서 오은영 선생님을 봤다. 편식 심한 아이 때문에 골치 썩는 부모가 솔루션을 구하고 있었다. 아이한테 이것저것 먹으라고 강요하는 엄마에게 "아이가 골고루 먹는 것보다 중요한 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해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윽박지르다가 오히려 아이랑 사이만 나빠진다는 뜻이었다. 양파 한 조각, 감자 한 덩어리 안 먹는다고 아이한테 큰일이 나진 않는다. 하지만 부모랑 사이가 나빠지고, 식사시간을 괴롭다고 인식하는 건 큰 문제였다.
그때 이후로 율이에게 '채소도 먹어야지!'라며 인상 쓰지 않았다. 밥을 이불처럼 덮어 반찬을 숨기는 일도 그만뒀다. 치즈를 미끼 삼아 입에 밥을 밀어 넣는 것도 스톱했다. 율이가 막 세 살이 되었을 때였다.
나는 제일 먼저 아이가 싫어하는 반찬을 인정해줬다. 밥을 줄 때, 잘 먹는 반찬 2개에 잘 안 먹는 반찬 1개로 구성했다. 좋아하는 돈까스와 감자볶음에 싫어하는 시금치를 더하는 식이었다. 싫어하는 반찬은 좋아하는 반찬보다 훨씬 적게 줬다. 시금치 한 줄만 식판에 올려줄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해도 처음에는 손도 안 댔다. 나도 먹어보라고 권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밥 먹을 때 아이만 쳐다보지 않았다. 아이가 식사할 때 나도 똑같이 급식판에 밥을 담았다. 아이와 똑같은 반찬을 그저 맛있게 먹기만 했다. "시금치는 안 먹어?"라고 닦달하는 대신 시금치를 수북이 담아와 그저 웃으면서 먹었다. 내가 먹는 모습만 봐도 '우 웩'하며 얼굴을 찌푸리던 아이는 어느덧 '저게 그렇게 맛있나?'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맛있게 먹는 모습으로 아이를 유혹한 것이다.
어느 날 시금치 먹는 모습을 한참 보던 아이가 자기 식판에 올려진 시금치 한 줄을 집어 올렸다. 아이가 "엄마 나도 한번 먹어볼까?" 했을 때, 나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최대한 덤덤한 표정으로 "한번 도전해봐!"라고 말했다. 마음속에서는 '세상에! 스스로 시금치를 먹겠다고 하다니!!' 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아이는 시금치를 입에 넣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에이 별로 맛있지도 않네."
"율이가 좋아하는 맛은 아니지? 그래도 이렇게 도전한 거 정말 멋있다! 스스로 먹겠다고 한 거잖아."
아이는 다음날부터 '별로 맛있지도 않은 시금치'를 먹기 시작했다.
마지막 방법은 엄마 스스로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채소를 안 먹는 것에만 집중하면 잔소리를 하게 된다. 나는 채소 대신 과일을 먹이면서 위안을 삼았다. 과일마저 거부하면 어린이용 비타민을 매일 챙겨서 '채소의 영양분이 여기 다 들어있으니 괜찮아'하며 나를 다독였다. '김치도 먹을 줄 알아야지!' 하는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먹어보고 싶으면 얘기해!"하고 주도권을 아이에게 줬다.
아이가 잘 먹으면 음식 하는 보람이 있다. 당연히 편식을 하면 밥 차리는 게 중노동처럼 느껴진다. 버려지는 반찬을 보며 왠지 모를 비참함과 울분이 함께 폭발한 적도 있었다. 또래보다 작은 아이가 걱정돼도 스스로 다독였다. 주문처럼 '계란, 밥, 김에 3대 영양소가 다 들어있다'라고 되뇌었다.
어느덧 4년이 지났다. 실오라기 같은 우엉 한줄기, 자기 손가락보다 짧은 오이 하나도 안 먹던 아이는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은 올리브, 브로콜리, 파프리카, 아스파라거스, 샐러리처럼 성인들도 거르는 음식을 잘 먹는다.
파프리카를 빼빼로처럼 간식으로 먹고, 파스타를 먹을 땐 블랙 올리브랑 함께 먹어야 맛있다고 한다. 후추만 뿌려도 맵다고 울던 아이가 8살이 된 지금은 시중에 파는 김치찌개, 떡볶이, 닭볶음탕도 문제없다.
밥상 앞에서 밥알을 세고, 채소를 골라내느라 고개 처박고 있는 아이가 답답하다면 차라리 못 본 척 하자. 다양하게 먹이려고만 하지 말고, 먹는 즐거움을 아이 스스로 알게 기다려야 한다. "밥 딱 두 숟갈만 더 먹으면 아이스크림 줄게."라고 흥정하는 엄마를 보면 아이는 밥 먹어주는 걸 자신의 권력쯤으로 착각한다. 아이러니 하지만, 엄마의 무관심이 아이의 편식을 고치는 비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