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의 시간은 유독 느리게 흐른다
예민한 아이를 키우는 예민한 엄마이야기
그늘진 아파트 뒤편.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아 꼬마 손님들의 발길이 뜸한 곳. 그네 두 개, 미끄럼틀 하나, 시소 하나가 전부인 작은 놀이터.
역시 오늘도 우리 둘뿐이다. 매일 어린이집이 끝나고 이 곳에 출근 도장을 찍는 아이를 위해 나는 해변에서나 가지고 놀 법한 모래놀이 도구를 챙겨 왔다.
"엄마 오늘은 여기다가 도로를 만들자. 내가 길 만들 거니까 엄마는 돌멩이 좀 주워 오세요."
"돌멩이는 뭐하려고?"
"당연히 돌멩이로 자동차 할 거지!"
아이의 씩씩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는 로션만 겨우 바른 까칠한 얼굴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없이 돌멩이를 주웠다. 열심히 모래를 파는 아이를 보며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율아, 오늘은 저기 유치원 앞 놀이터에 가볼까?"
"싫어. 거기 애들 많아서 싫어."
"언니 오빠들 말고, 율이 친구들도 자주 오던데. 가면 민하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고."
"아니야. 나는 민하보다 엄마랑 노는 게 더 좋아. 엄마 돌멩이 다 찾았어?"
아이는 걸음마할 때부터 놀이터를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있는' 놀이터를 싫어했다. 잘 놀다가도 누가 나타나면 부리나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집에 가자는 뜻이었다.
"크면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어린이집을 다닌 지 1년이 넘었는데도, 해가 바껴 유치원에 다니는데도 여전히 그랬다. '난 친구들 싫어!', '엄마 같이 하자'라는 말만 들어도 목 울대 밑에서 뜨거운 게 올라왔다.
어느 날 구청에서 운영하는 장난감도서관에 갔다가 게시판에 붙어있는 글을 봤다. '영유아 가정 방문 상담'이라고 쓰인 종이를 보고 얼른 신청서를 냈다. 유아교육전문가와 부모상담전문가가 2인 1조로 매주 한 번씩, 한 달 동안 집에 방문해서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오랜만에 구석구석 집을 치우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아이에게는 미리 선생님들이 오실 거라고 말해뒀지만, '딩동' 벨소리에 아이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이는 누가 집에 오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친근하게 손 흔들며 들어오는 선생님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저 멀뚱멀뚱 서있었다. 나는 얼른 준비한 카드를 꺼내면서 말했다.
"이거 율이가 좋아하는 거지? 가지고 놀고 있어. 엄마는 선생님들하고 얘기 좀 할게."
아이는 입을 삐죽이며 마지못해 카드를 받아 들었다.
전문가 두 분은 소파에 앉아 나에게 고민을 물어보셨다. 나는 아이가 너무 예민하고 사회성이 없다는 고민과 함께 혼자서 육아하는 게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천일동안 밤낮으로 얘기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데, 아이는 눈치없이 말을 끊었다.
"엄마 이거 여기다 놓을까?"
"엄마 나 이거 해도 돼?"
아이는 평소처럼 카드를 줄 맞춰서 정렬해놓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중간중간 아이의 물음에 답하는 나를 보고 유아교육전문가가 말했다.
"어머님, 아이가 예민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어머님도 매우 예민하신 분이에요. 예민한 엄마가 예민한 아이를 키우니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지요.
아이가 정렬하고 규칙 지키는 걸 좋아하지요? 변화를 싫어하고, 통제 불가능한 환경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예요. 그러니 놀이터에서 친구들하고 노는 것조차 괴로울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어머님께서 계속 맞춰주기만 하면 아이는 더 고립됩니다.
자, 이거 보세요."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고, 그녀는 아이가 30분 넘게 정렬해 놓은 카드를 손으로 툭 쳐서 헝클어뜨렸다. 아이는 너무 당황해서 울지도 못하고 나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봤다.
"어머, 미안해. 어쩌지? 그럼 우리 새로운 놀이 해볼까? 포도 그림 찾기 어때?"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며 아이는 어쩌지 못하고 카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선생님은 재빨리 포도 그림 찾기 놀이를 시작했다. 울상을 짓던 아이도 어느새 새로운 놀이에 푹 빠져들었다.
"어머님, 아이를 배려해주시는 건 좋아요. 하지만 미리 아이가 불편할까 봐 모든 장애물을 막고 계실 필요는 없어요.
예민한 아이라서 새로운 걸 접할 때마다 보통 아이들보다 더 많이 괴로워하고 짜증 부릴 거예요. 그래도 계속 시도하게 해 주세요. 아이가 스스로 경험해봐야 확신이 생기고, 자신감도 생깁니다. "
나는 그날 엄마가 된 이후 가장 많이 울었던것 같다. 아이가 징징 거리는 게 싫어서 미리 나서서 모든 걸 해버린 건 아닌지 후회가 됐다. 나는 깨달았다. 아이는 친구들이 싫다고 했지만, 사실은 어울려 놀 자신이 없었다는 걸. 그날 이후 방법을 바꿨다.
아이와 여러 친구들이 있는 놀이터에 가는 대신 일대일로 만났다. 우리 집에 초대하기도 하고, 친구 집에 가기도 했다. 집에서 둘이서만 놀이하니까 어색해하던 아이도 금방 편안해했다. 집에서 몇 차례 적응을 끝내고 놀이터로 나갔다. 물론 자주 놀이했던 친구와 함께 했다. 처음에는 다른 언니 오빠들이 있다고 싫어하더니, 이내 친구와 놀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초등학생이 된 지금, 아이는 친구들과 손을 꼭 잡고 다닌다.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하며 "놀이터에서 놀자"고 키득거린다. 별로 친하지 않은 같은 반 친구에게도 "우리 같이 그네 탈래?"라고 먼저 말할 줄 알고, 줄넘기 시합을 하면서 깔깔거린다. 간식 먹는 잠깐도 못참고 얼른 친구들과 놀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 거리는 걸 보면 웃음이 나온다.
아이는 여전히 변화를 많이 두려워한다. "한번 해보지 뭐!" 하면서 저벅저벅 나아가는 아이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한발 물러섰다가 다시 두발 나아가는 아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일까. 내 아이의 시간은 유독 느리게 흐른다.
오늘도 나를 달랜다. 엄마인 내가 대신해 줄 수도 없고, 장애물을 모두 치워줄 수도 없다고. 그저 충분히 망설이고, 스스로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엄마의 역할'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