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까칠이로 살기
나는 오랜 기간 동안 순둥이로 살아왔다. 흔히 어른들이 얘기하는 '착한 아이'로 말이다. 어른들이 정해주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 해야 하는 것을 어떻게든 잘 지켜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한 마디로 표준에 가까운 삶을 살도록 머릿속 회로가 그려지고 있었다. 내 의식의 기조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게 유지되어 왔다. 그 안에서의 내 모습은 이랬다.
웃으며 건네는 들어주기 싫은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더 바보 같은 것은, 늦어도 이건 아니라고 말할 줄 알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별 일 없을 것이라 여기며 부탁을 들어주고는, 결국 내가 입은 손해를 감내했다.
나중에라도 다음부터는 그런 부탁을 자제해 달라는 말은 꺼내 보지도 못했다.
내 생각보다 상대의 생각을 불필요하게 인정해 준 나머지, 내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무언가가 전개되었다.
너무 쉽게 상대의 생각에 수긍해 버리기도 했고,
해보다가 이건 아니라 말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내 주관이 점점 흐려져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다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가 되어버렸다.
'좋은 게 좋다.'라는 생각으로 접근했지만 결과가 항상 좋지만은 않았다.
내 생각처럼 사람들의 의도는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지만, 순진하게 '아닐 거야.'라며 가볍게 넘겼다.
결국 내게 좋은 것보다, 타인에게 좋은 결과를 안겨다 주었다. 흔히 말하는 '호구'일 때도 많았다.
호의에서 끝나지 않고 상대의 권리임을 불필요하게 각인시켜주며 삶이 점점 더 피곤해졌다.
관계의 가지치기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내가 내쳐질까 두려워하며 끊어내지 못했다.
내 감정보다 타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배려하기도 했다.
'이렇게 얘기하면 기분 나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누군가를 대했지만 결국 돌아오는 반응은 나의
감정을 나만큼 배려하고 있지는 않았다. 지나친 배려와 지나친 기대로 쓸데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나는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믿었지만 나만 인지하지 못하는 만만하기 그지없는 '호구' 일 때가 많았다. 내 삶을 스스로 다루는 주인이 아닌, 누군가의 삶에 들러리로 살아온 순간이 더 많았다.
몰랐지만 이런 과거를 생각해보니 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고, 착한 어른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으로 자랐다.
그런데, 그 순둥이가 까칠이로 변하기 시작했다.
내가 주변에 까칠이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다. 아무래도 직장이라는 조직이 주는 다양한 경험 (((예를 들면, 다른 부서의 누군가에게 쉽게 설득당해서 그들의 일을 내가 대신하고 상사에게 박살 나는 경우. 회의석상에서 일거리를 받아와 박살 나는 경우, 일처리가 미흡해 박살 나는 경우 등등))) 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지만, 가장 큰 요인은 그런 과정을 거치는 와중에 스스로 탐구하며 깨달은 직원으로서의 내 정체성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벌거숭이 신입사원이 창과 방패와 갑옷을 두른 용감한 무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이랬다.
당당했다. 그리고 당돌하기도 했다.
나이나 직위를 따지지 않고 당당하게 할 말을 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히 건방져 보였을 것이다.)
쓸데없는 말로 현혹하는 직원들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화를 내곤 했다.
눈치를 보지 않고 합리적인 의견을 당당히 제시했다. 자연스럽게 주관적인 사람이 되었다.
내가 먼저여야 했다.
내 일이 더 중요했기에 내 것을 먼저 챙겨야 했다. 내 일 후에 다른 이들의 일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일은 그들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상사와 내 상사는 엄연히 다르고, 조직이
구분되어 있는 이유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적절한 Give & Take 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가졌던 지나친 배려심과 양보와 희생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 갔다.
망설임과 우유부단함이 줄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을 찾았다.
규칙, 규정을 이해한 후 그대로 수행해 보았다. 타성에 젖어 규정을 무시하던 사람들이 술렁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작 내가 아닌,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감, 판단력, 의사결정 능력이 향상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사람들이 주위에 생겨났다.
누군가에게 이끌려 다니지 않는, 당당한 2년 차 사원이 되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까칠이'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좋았다. 불필요하게 혼자서만 감정의 상처를 만들지 않아도 되었고, 원치 않는 일과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도 되었고, 불필요한 관계를 끊어내기 좋았다. 다소 냉정해 보이기도 했겠지만, 나 스스로를 충분히 잘 지켜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와 달리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삶을 사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리고, 행복했다.
나는 까칠이가 되어서야 보다 나다운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진작에 까칠이의 모습이 필요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까칠이는 나를 지켜주고, 나다운 나를 발견하게 해 준 내 안에 숨어 있던 또 다른 내 친구였던 셈이다.
지금 내 모습은 때론 순둥이, 때론 까칠이다. 지난 10여 년의 직장 생활과 이직, 결혼과 육아를 경험하며 자연스레 균형을 찾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지금 나는 과하게 나를 보호하지도, 내어놓지도 않고 살아간다. 그 덕에 누구에게 쉬이 상처 받지도 않고,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전전긍긍하지도 않고, 눈치를 많이 보지도 않고, 타인에게 큰 장벽을 두르면서 살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나를 냉정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도 알지만, 냉정해야 할 때는 또 그런 것도 필요하다는 걸 알기에 굳이 부정하거나, 억지로 그 모습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게 지금의 '나'이고, 그게 내 가치관이니까. 내 자신을 버려가면서까지 상대가 원하는 데로 맞추어 나가는 순둥이가 아니라, 적절한 양보와 희생과 자기 보호의 균형을 갖춘 적당한 까칠이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순둥이의 모습과 까칠이의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까칠이의 모습보다는 순둥이의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더하기 부호를 붙여야 하는 것은 언제든 까칠이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와, 그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멀어질까 하는 두려움을 갖지 않을 자신감과, 언제라도 당당한 까칠이가 될 수 있는 자그마한 용기가 아닐까?
그로 인해 자신에게 빼기 부호가 붙여질 두려움이 아니라, 그로 인해 더하기 부호를 붙일 수 있는 보다 자신다운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