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껍데기에 매몰되지 않기
어린 시절부터 동생 덕에 잠시 알고 지냈던 친구가 있었다. 중학교에서 같이 만나 친분을 쌓았지만 고등학교를 달리 진학하며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내 인생의 두 번째 수능시험을 얼마 남지기 않은 어느 늦은 여름이었다. 그때의 그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시껄렁한 옷을 입고, 담배를 당당하게 물고는 또래 2명과 함께 길을 걷고 있는, 겉으로 보아선 누구나 피하고 싶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도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는 잔뜩 머금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뭐고?'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머쓱한 인사를 뒤로 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것으로 오랜만의 만남은 짧게 끝났다. 그의 모습은 소위 말하는 '동네 양아치'였다.
반면에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공부밖에 모르는 '찌질이'에 가까웠다. 어찌 보면 그가 내게 그런 리액션을 보였던 것이 당연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은 내가 매일 가는 독서실에서였다. 그곳에서 마주칠 것이라는 생각은 1도 하지 못했던 터라 굉장히 놀랐다. 그날은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날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여자 저차 그곳에 오게 된 연유에 대해 물었지만 대답을 피했다. 서먹한 관계가 얼마간 유지되었지만 그나마 옛 추억 덕분인지 그가 내게 가졌던 경계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가끔씩 연락이 닿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내 다시 모습을 보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간 많은 대화에서 그리고 둘만의 술자리에서 나는 그가 왜 그런 행색을 하고 다니는지, 왜 그곳에 오게 되었는지, 왜 가끔씩 모습을 보이지 않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연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어려운 집안 사정 탓에 고등학교를 중퇴한 그는 생계를 위해 무작정 생업전선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결국 유혹의 손길을 이기지 못해 동네 조직폭력배의 일원이 되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3년. 당장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마무리 짓지 못했던 고등학교 졸업장 취득을 위해 잠을 줄여가며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패스했고, 이제 대학 진학을 위해 그곳에 오게 되었다. 사실 그는 그 생활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었다.
나는 그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왜인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냥 그가 끌렸을 뿐이다. 좋지 않은 소문의 주인공이던 그는 내게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느껴졌다. 그가 조폭 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전혀 두렵거나 기피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도 내가 이상하다 생각했었단다. 다른 사람과 달리 자신에게 친절하고 거리낌 없는 나를 무척이나 신기하게 생각했었단다. 모두가 자신을 피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기에, 미치거나 아니면 숨은 속셈이 있을 거라 의심했었단다. 그래선지 자꾸만 다가가는 나를 그는 억지로 밀어내려 했었다. 자꾸만 내 의도를 확인하려 하고, 캐묻기도 했지만 나는 그저 내 마음을 표현했던 것뿐이었다.
어쩌면 그 친구는 그동안 받고 싶었던 도움의 손길을 내게 뻗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상처를 받지 않으려, 알맹이와는 다른 껍데기로 스스로를 억지로 보호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점점 서로의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호기롭거나, 초라하거나, 당돌하거나 한 그런 껍데기가 아닌, 나름의 상처가 있지만 순수한 알맹이를 보기 시작했다. 3개월이란 짧은 시간 안에 우리는 그렇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수능시험을 목전에 둔 어느 날, 그가 양팔에 깊게 난 상처를 동여매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잠시 울더니 이내 웃었다.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위해 그 생활을 청산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껍데기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알맹이를 세상에 드러내고 있었다.
꼭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40대의 흔해 빠진 아저씨가 되어 각자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각자의 인생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변치 않는 것은, 서로에 대한 껍데기를 버리면서 얻은 서로의 알맹이였다.
우리는 종종 사람의 껍데기에 모든 시선과 마음을 빼앗겨 버리기도 한다. 실수라기보다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바삐 흘러가고 TMI에 노출되어 자신과 타인의 껍데기에 치중하기 쉬운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사람의 껍데기라는 것을 우리의 삶에서 빼려고 애쓰는 순간 그보다 값진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 아닐까? 내가 둘도 없는 친구를 얻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