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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마리아 Nov 12. 2024

에필로그,「이별, 아름다운 임종」

브런치를 시작하며 연재하기 시작한 「이별, 아름다운 임종」을 21화로 마무리한다. 6월 중순부터 시작하여 5개월여를 매주 화요일에 계속하여 올렸다.


애초에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죽음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돌아가심을 계기로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죽음학으로 공부하기도 하였고 강의를 통하여 죽음에 대한 답을 찾으려 헤매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을 보낸 슬픔과 애도를 그런 방식으로 해소하지 않았나 싶다.

      

이 글의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썼던 글들을 다시 찾아보았다. 처음 시작할 때 이 글의 출간 의도를 이렇게 적었다.      

  노년과 죽음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지만,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주변에서 보았던  이별의 과정과 임종의 순간들을 나누면서 바람직한 죽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죽음을 두려움으로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잘 준비하여서 아름답게 맞이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이 의도는 살아 있고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 글을 연재하면서 마음 속의 공허나 슬픔, 불안 등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프롤로그에서는 이 글을 심정을 이렇게 밝혔었다.   

아버지가 가시고 난 10년, 장례로 끝난 것 같았던 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는 끝나지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애도해야 할 것을 애도하지 못하고 참회해야 할 것을 참회하지 못하는 마음에 눌려 지냈다. 이렇게 고백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자식이었다고...  자식들의 이런 마음을 생전에 익히 보고 느끼고 알고 계셨을 아버지께 참회하고 싶었다고. 마지막 가시는 길을 너무 참담하게 해 드렸다고 목놓아 울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번도 마음 놓고 울지 못하였다. 울음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고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돌덩이처럼 메말라 갔다. 아무에게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하지 못했다.    

그동안 십 년이 넘도록 찾아다녔던 죽음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가장 중요하지만 두려운 것. 죽음이라는 주제는 가능하면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한시도 죽음을 잊지 않고 이러저러한 죽음을 목격하지만 방치하거나 피하는 것으로 대처하였다. 죽음이 과연 뭘까.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알기 위해 찾아다녔다. 죽음에 관한 책과 자료들을 찾고 강의를 찾아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나에게 이렇게 길게 남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죽음을 회피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 특별히 이 세상과 이별하는 임종의 순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돌아가신 분들의 임종 사례들을 통해 임종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었다.

 두렵고 무섭다. 왜 무섭고  두려운지 모르면서 우리 모두는 죽음의 공포 앞에 서 있다. 듣고 싶지 않아도 이러저러한 죽음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은 과연 두려운 것인가. 언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 이야기를 하고 싶고 듣고 싶었다. 우리는 죽음을 어찌해야 하는가. 모른 척해야 하는가. 아는 척해야 하는가.     

나는 내가 속해 있는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실제로 보는 경험을 많이 하는 펀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런저런 경로와 다양한 임종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거나 선입견으로 갖고 있는 죽음과 임종에 대해 실제적인 사례들을 남기고 싶었다.     


5개월여 동안 썼던 이십 명에 이르는 분들의 이야기는 내 주변에서 잘 아는 분들의 이야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분들에 대해 최선의 예의와 경의를 갖추고 싶었다.    

 이 글을 쓰면서 여기에 올려지는 글의 주인공들에게 최선을 다한 예의와 공경을 갖추어 쓰고 싶다. 그분들이 살아온 삶과 죽음, 그리고 임종의 순간에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 돌아가신 분들의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기도한다.   

위에서 의도했던 나의 마음이 제대로 표현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이 분들을 이제는 보내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 글을 쓰는 것으로 내 나름의 애도 의식을 치렀다는 생각을 하게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 분의 임종 이야기를 쓰지 못하였다. 이 글을 쓰게 하였던 우리 부모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는 쓰지 못하였다. 가장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결국 또 못 쓰고 다음으로 미룬다. 아마도 나는 두 분 부모님과 아직 이별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동안 이 글을 읽어 주신 많지 않은, 그래서 더 소중하였던 독자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아무리 혼자 쓰는 글이라도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계속 쓸 수 있었고, 부족한 제 글을 읽어달라는 무언의 호소에 손 내밀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린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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