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식사
식도락은 내 여행의 이유이다. 보고 듣는 것도 좋지만 오감을 자극하는 식음이야말로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에 하나다. 나는 여행지에 지인이 없는 이상 주로 인터넷 서칭을 통해서 식당정보를 얻는데, 보길도는 정보가 없었다. 제주도를 생각하며 섬 여행이니 해산물 파티를 원없이 할 줄 알고 기대를 한껏 했는데, 난관에 부딪혔다. 일단 식당 자체가 별로 없었고, 그 식당에 간 후기들은 더 찾아보기 어려웠다. (생각해보면 제주도는 섬이라고 하기에는 이제는 너무나 육지화된 곳이다. 섬 특유의 분위기보다는 이색적인 육지 땅 느낌이 더 강한 것 같다.) 나는 여행지에서 번잡스럽게 차려 먹는 걸 선호하지 않는데, 보길도에서 묵었던 숙소 근처에는 푸른 바다만 있을 뿐 식당이 없었다. 식당은 면내로 나가야만 했는데, 차를 타지 않는 이상 쉽게 갈 수 없기 때문에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끼니 해결이 쉽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면내로 나가 장을 봤다. 과일 몇 개와 맥주 그리고 컵라면 가득..ㅎㅎ 혹시 모를 식량난에 대한 대비였다. 실제로 비상식량은 꽤 유용했다.
보길도에 머무는 3박 4일 동안 매일 1개 이상의 식당을 방문했는데, 총평을 하자면 보길도에서는 식도락 여행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섬에서의 식사는 생존을 위해 먹는 것에 가깝다. 식당 자체도 많지 않고, 그러다 보니 맛이나 서비스 면에서 기대를 하기가 어렵다. 더 어려웠던 점은 위생까지도 기대에 어긋난다는 점이다. 슬픈 건 가성비도 좋지 않다. 섬이기 때문에 해산물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배를 타고 들어오기에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섬 여행자들이여, 목구멍에 밥이 넘어간다는 것에 만족하자.
1. 나무숲
앞서 보길도 식당들에 대한 악평을 쏟아 냈지만, <나무숲>만큼은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맛, 위생, 서비스, 가격 모든 면에서 훌륭한 식당이다. 모 포탈에서도 이 식당에 대한 평이 좋았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3박 4일 보길도에서 머무는 동안 두 번이나 들릴만큼 맘에 든 식당이다. 섬을 나올 때는 다른 식당 가지 말고 나무숲에만 가서 먹을걸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괜찮은 식당이다. 이 집의 시그니처는 해초비빔밥이다. 일단 전라도답게 8가지 반찬이 깔린다. 반찬들이 조금 짜긴 짰는데, 일단 다 신선하고 밥하고 먹으면 무리 없을 간이다. 해초비빔밥은 밥에 각종 해조류와 김, 전복, 날치알이 올라간다. 섬에 도착한 첫날의 저녁식사가 좀 충격적이어서 걱정을 하고 들어갔는데, 정갈하고 신선한 한 상에 굉장히 기분 좋은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해초비빔밥을 먹은 다음 날 또 나무숲에 갔다. 전복회를 시키고 싶었는데, 사장님이 전복을 직접 취급하지 않으셔 1kg 이상부터만 주문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시킬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둘이서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을 것 같아 과감히 갈치구이를 주문했다. 친구는 보길도에서 제주도산 갈치구이를 먹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지만 난 사장님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제주도는 날이 맑으면 보길도에서 보일만큼 가까운 섬이기에 신선도도 의심치 않았다. 아니 뭐 삼겹살이나 닭이라 한들 보길도에는 다 배 타고 들어올 테니 크게 다를까. 20분 정도가 지나고 갈치구이가 나왔고, 친구의 우려와는 다르게 우리는 갈치에 갈채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압도적인 크기에 놀랐다. 4만 원이라는 가격이 아깝지 않은 갈치 크기였다. 성인 둘이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이였고, 얇고 바삭한 은갈치 껍질 속 부드러운 갈치 속살이 정말 일품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먹은 갈치구이 중에 최고라고 할 만큼 맛있었다! 엄지 척을 부르는 맛이다.
섬에서 몇 번의 실망스러움 끝에 만난 식당이어서 그랬을까. 식당 안에 걸려있는 글귀에서 섬에 오는 손님들에게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주시는 사장님의 마음에 고마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마음이 음식으로 전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 끼였다.
<나무숲 한켠의 서예글>
나름나름 준비한 음식 오시는 분 만족하며 즐기시네. 무엇이나 특별한 맛 아닌 평범한 손맛으로 준비하고 숲이 없는 나무숲의 작은 집에는 오늘도 그래다 오셔 식음을 해결하니 감사하고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갖고 당신과 함께 희망을 그려봅니다. - 기해가을소전.
2. 노화도 수정횟집
이 집은 섬에 들어온 첫날 보길도의 식당들이 문을 많이 닫아 노화도까지 내려와 들린 식당이다. 완도에 온 만큼 전복회를 먹으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들어간 집이다. 우리는 전복회(40,000원)와 전복죽 특(15,000원) 2개를 시켰다. 전복회는 얼마나 시켜야 할지 감이 없어 사장님이 5만 원어치 시키라는 걸 4만 원어치만 달라고 했는데, 역시나 이것도 좀 많았다. 일단, 전복 자체는 알이 정말 실하고 신선했다. 전복 알이 정말 커서 전복회만 다 먹었는데도 배가 상당히 차올랐다. 문제는 전복회 외의 모든 것들이 실망스러웠다는 점이다. 일단 손님이 꽤나 안 왔던 건지 식당의 위생상태가 정말 문제가 많았다. 물과 물컵에서는 군내가 많이 나 예민한 친구는 손도 안 댔다…ㅎㅎ 나는 섬마을 식당의 위생에 대해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기에 이해하려 했으나 전복죽에서 기분이 상해버렸다. 전복죽 일반과 특의 차이가 전복 양의 차이라고 해서 특으로 2인분을 시켰는데, 전복죽에 뿔소라를 섞으셨다. 뿔소라와 전복도 구분 못할 정도로 우리가 어리숙해 보였나.. 싱싱한 전복은 푹 끓여도 질기지 않고 툭툭 으스러지는데, 뿔소라는 질기다. 문제는 전복죽에 전복은 찾아보기 힘들고 뿔소라가 더 많았다는 점. 사장님께 말씀드릴까 하다가 이미 약주가 과하신 상태라 말없이 전복죽을 절반 이상 남기고 나왔다. 여행 와서 이렇게 바가지 쓰면 서러워진다.. 섬이라는 공간이 주는 육지와의 심리적 거리감 때문에 더욱 서러웠는지도 모르겠다.
3. 보길도 우리식당
이 식당은 섬에 머무는 동안 갈까 말까를 10번 이상 고민한 집이다. 검색포탈에서 위생의 문제가 지적되어 있어 망설여졌는데, 동네 주민분들에게 괜찮을 식당을 물어보면 모두가 입을 모아 우리식당을 말했다. 찜찜한 마음을 가지고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메뉴는 굉장히 다양하다. 고민 끝에 전복 된장찌개와 제육볶음 중자를 시켰다. 가격은 만만치 않고, 공기밥도 추가 주문을 해야 한다. 음.. 굳이 길게 얘기하고 싶은 식당은 아니다. 점심시간 우리 식당은 섬에서 일하시는 분들로 바글바글했지만, 내 입맛에는 와닿지 않았다. 굉장히 투박한 맛이었다. 그렇다고 재료가 신선한 것도 아니었고. 몇몇 반찬은 요리한 지가 오래됐는지 군내가 났다. 그런데 가격은 서울 백반집의 두 배이니.. 유쾌한 식사는 아니었다. 생존을 위한 식사였다고 나를 위로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