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신용(2)
아경과 한때 같은 부서에서 일했던 사람들 중에 늘 돈이 없다는 후배 A가 있었다.
A는 아경과 비슷한 월급에 싱글이었다.
부모가 내어준 보증금으로 전세를 사니, 월급은 오직 본인이 쓰는데 늘 돈이 없다고 했다.
같이 점심을 먹을 때도 돈이 없다는 얘기를 주구장창 입에 달고 있으니, 분위기 상 번번이 몇 해 선배인 아경이 낼 수밖에 없었다.
서너 번 아경이 밥을 사고나면 그제야 한번 정도 후배는 밥값을 냈다. 그것도 굳은 표정으로 마지못해서 내곤 했다.
마치 <돈없는 내게 꼭 밥을 얻어 먹어야 직성이 풀리겠어요>하는 조금은 원망하는 얼굴이었다.
아경은 다른 동료에게 9번 정도 사야 A가 한번 정도 밥값을 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어서 그나마 자기는 좀 나은 처지였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A는 아경에게 퇴근 후에 저녁을 먹자고 했는데, 결국 사달라는 얘기였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싶어서 뭘 먹고 싶냐니까, 한정식집에 가자고 했다.
1인당 20만원에 육박하는 한정식집을 고르면서 이 정도는 돼야 먹을만하단다.
아경은 거부했다. A에게 그런 비싼 저녁을 사야하는 이유가 없었다.
저녁은 가볍게 먹고 싶다고 하며 A를 데리고 쌀 국숫집으로 갔다. 물론 밥값은 아경이가 냈다.
A는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며 깨작거리다가 음식을 반 넘게 남겼다. 한정식집에 갔더라면 거의 남겼을 것이 분명했다.
되돌아 생각해보니 A는 늘 그랬다.
아경은 자신이 사주는 밥을 맛있게 먹는 사람을 좋아했다. 돈 버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고, 환경을 생각해도 그랬다.
그러던 어느 겨울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또 아경은 A에게 밥을 사고, 커피까지 샀다.
늘 그렇듯이 A는 <돈 없다>고 말하며, 아경에게 계산을 떠밀었다.
아경이 커피값을 내려고 하는데, 계산대 뒤에 있는 대형 거울에 자신과 A의 모습이 나란히 비쳐졌다.
그제서야 아경은 깨달았다.
왜 A가 늘 돈이 없는지.
A는 컬이 풍성하게 살아있는 긴 갈색머리에 고급스러운 모피 털이 목 주위에 달린 비싼 코트를 입고 멋진 가방을 어깨에 매고,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고 있었다.
한마디로 부티가 철철 났다.
반면에 연일 야근에 시달리는 아경은 하나로 모아 꽉 묵은 헤어스타일에 염색을 못 해서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삐져나오고 낡은 오리털 점퍼를 입고 있었다.
A에 비하면 정말 후줄근했다.
그런데 번번히 지갑을 여는 것은 아경 자신이었다. 아경의 등 뒤에서는 그녀의 열린 지갑을 보며 A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 내가 호구구나>
그 이후에 아경은 A의 소비생활을 면밀히 지켜봤다.
A는 고급 미용실에서 주기적으로 펌과 염색을 하고 강남에 있는 피부과에서 수백만 원짜리 관리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유명 브랜드의 비싼 옷과 가방, 신발들을 입고 들고 신고 있었다. 화장품도 아경은 알지도 못하는 브랜드였는데, 하나같이 꽤 고급스러운 용기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A가 늘 돈이 없는 진짜 이유였다.
아경은 문득 예전에 알던 대학 동기가 생각났다.
부자 의사인 아버지가 사준 자동차를 몰고 학교에 오던 동기는 늘 아경에게 ‘백 원만’을 외치며 자판기 커피값을 악착같이 뜯어갔다. 1990년대였으니 자판기 커피값이 100원이었다.
아경은 그 동기를 이름보다는 <백 원만>으로 기억했다. 별명이 하나 더 있기는 했다.
<두 시간>이었다. 동기는 약속시간에 늘 늦었는데, 최장 지각이 '두 시간'이었다. 그녀는 타인의 돈과 시간에 대한 존중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백 원만>도 자신을 꾸미는 것에는 아낌없이 투자하고,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호기롭게 돈도 잘 쓰고 집까지 자기 차로 태워준다는 것을 알았다. 여담으로 아경은 <백 원만>의 차를 단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었다.
후배 A와 대학동기 <백 원만>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쓸 돈은 있지만, 타인에게는 쓸 돈이 없는 사람들.
아경은 그들이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고 자신은 모자란 사람처럼 여겨져서 조금은 침울해졌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싶었다.
빠른 손절이 답이었건만, 그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
아경은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간직하며 A와 조금씩 거리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