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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스타쉔 Jul 03. 2020

홀든 콜필드라면?

호밀밭의 파수꾼

“선희야! 저렇게 짝퉁 스타벅스에 앉아 있는 사람은 왠지 정신 상태도 이상할 것 같지 않니?”


이렇게 말했던 초등 동창과는 오래전에 말을 더 이상 섞지 않고 있다. 홀든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속물근성에 충분히 절어 있는 그에게 주먹을 날리지 않을까.


세상 대다수 사람들의 위선 속에서 진실과 본성을 찾으려고 하는 홀든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영혼을 지켜주고 싶어 한다.



성장소설의 표현은 미국 중상류층 남학생의 시각을 잘 반영하고 있는 덕분인지 한국의 여학생이 바라본 시각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어 다소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1950년대 미국 사회

<호밀밭의 파수꾼>이 탄생한 시기는 작가 J.D. 샐린저가 2차 대전 노르망디 작전 직후로 샐린저 또한 단순한 반항아 기질을 지니고 있던 작가 초창기 실제 전쟁이라는 상황을 겪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한다.



1950년대에 중산층들은 교외로 이사 가기 시작했으며, 잔디밭에서 바비큐 파티를 열고, 세탁기와 텔레비전 수상기를 들여놓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의 미덕을 존중했고, 정원에는 동양의 약초를 심었으며, 애국심과 건전한 정신을 숭상했다. 샐러리맨들은 단조롭고 모범적인 '회색 플라넬 양복'을 입었고, 여성들은 부엌에 접시세척기나 냉장고나 블렌더(믹서) 등의 전자제품들을 들여놓고 좋아하고 있었으며, 가정에서 부인들을 불러 모아 판매하는 터퍼웨어 파티에 다니기 시작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이는 전형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또한 경제 붐이 일었던 1980년대 사회 분위기와 일맥상통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군부 정치 체제 아래 억압되어 정치에의 반발이 심했던 반면 미국 사회는 상류사회, 부르주아 계급을 바라보는 속물근성에 사춘기 십 대에서 대학 진학하던 이십 대의 젊은 세대에게 지성과 실재하는 가치의 추구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홀든 콜필드, 그는 사회 기류에 합류하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십 대인가? 아니면 팽창하는 사회의 분위기 속에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작은 몸부림을 치는 반항아인가?


아이러니하게도 홀든 역시 중상층 가정의 소위 돈 있는 집안을 배경에 두고 있다. 그가 반항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가난한 계층에 비교하자면 사치스럽기도 하다.


구글 이미지 검색 : 호밀밭


퇴학당한 학교를 뛰쳐나와 호텔을 옮겨 다니며 반항하는 그는 십 대 치고는 주머니 사정도 넉넉하고 어른 흉내를 내며 소위 그가 싫어하는 부르주아적 행동을 보이고 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들은 노래 가사에 마음이 동해 -여기서 그는 그 나름대로 잘못 들어 재해석을 하게 된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자처한다. 이런 그의 마음속 꿈을 끌어낸 존재는 그가 그렇게 지키고 싶어 하는 순수한 어린 동생 피비이다.


아빠는 오빠를 죽이고 말 거야.” 하고 피비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듣고 있지 않았다.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미치광이 같은 것을.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말해줄까?” 하고 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무ㅏ가 되고 싶은지 말해줘? 만일 내게 그 지랄같은 선택권이 있다면 말야.”
“뭔데? 욕 좀 하지 말고 말해봐.”
“너 그 노래 알고 있지? ‘호밀밭을 걸어오는 사람을 붙잡는다면’ 하는 노래 말이야. 바로 내가 되고 싶은 것은......”
“그건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를 만나면>이라는 노래야.” 하고 피비가 밀했다. “그건 시야. 로버트 번스가 쓴.”


그의 형 D.B.는 그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영화 작가의 삶을 살고 있다. 그의 가족 구성원 중 그가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은 실재하지 않거나 - 죽은 동생을 의미한다 - 사회에 때묻지 않은 존재뿐이다.


홀든의 이런 순수의 동경, 속물에 대한 묘사와 반어법 등은 아마도 당대 청년들의 마음속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실상에서는 사회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청년들의 반항 심리, 그리고 그들이 찾고자 하는 순수를 대변했던 것이다.


사실, 앞서 말했듯이 나에게는 그다지 공감 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남학생의 사고방식은 여학생의 그것과 너무 동 떨어져 있기도 하고 미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도 존재한다.


원서의 표현을 그대로 읽어야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말에 원서 대신 -원서로 다시 읽자니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 오디오북을 듣고 있다. 한국어보다 원서로 들으니 그 상황이 조금 더 이해가 가는 듯도 하다.


매년 250만 부가 팔리며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던 작가 J.D. 샐린저는 타계 후 본인이 그렇게도 싫어했던 영화라는 장르에 진출한다. <호밀밭의 반항아>라는 제목의 영화로 <호밀밭의 파수꾼> 탄생 배경과 작가의 삶을 담고 있다.


책 표지에서 홀든을 그려버리면 독자들이 그를 상상하는데 제한된다는 그의 말에 공감한다.

어린 시절 그림 동화책에서 그림이 거의 없는 소설책을 읽으며 러시아, 미국, 영국 등의 문학을 접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이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니까. 작가의 말처럼 독자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그림이나 삽화는 배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아이들을 지켜내는 홀든의 모습을 나만의 해석을 담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그가 추구했던 순수를 지키는 마음에 나도 한 마음 보태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위대한 작가처럼 글을 쓸 수는 없겠지만, 그런 작가의 글을 읽고, 이해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퍽 기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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