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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스타쉔 Dec 22. 2020

<혈류> 이립 장편 소설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기까지

대개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쯤 상상해 봤을 법한 가상의 복제된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현재 나는 내가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12살 무렵 무척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지구와 우주 그리고 저 너머에 다른 우주가 존재할 거라는 알 수 없는 믿음 같은 게 있었다.

이런 상상력 덕분에 상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실재하지는 않으나 일어날법한 상황을 그려볼 수 있다. 6년 전 발간된 소설이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전개는 아마 이런 적절한 표현 덕분인 것 같다.



작가의 친필 싸인본의 책을 간직하게 되는 것은 퍽 설레는 일이다. 오래전 기자로 활동할 때 인터뷰할 작가를 만날 때면 으레 책을 사서 사인을 해달라곤 했었는데 낯선 누군가와의 첫 만남에서 친밀함을 표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과거의 일상과도 같던 일이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되고 나니 퍽 소중한 순간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더 단숨에 책을 몰입해서 읽게 됐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샐린저는 영상물의 대중화를 경멸하고 세상과 동떨어져 글쓰기에 파묻혔다.

오랜 시절 무명으로 활동하던 화가 마크 루소 역시 뒤늦게 <무제> 시리즈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지만 가벼운 대중화를 싫어했던 예술가였다.


<혈류>에서도 작가의 글을 보면 마치 시각 영화를 보는 듯 굉장히 빠른 전개 감이 느껴지지만 만약 이것을 영화를 본다면 이런 느낌은 반감될 것 같다.


항상 책이 영화보다 훨씬 생생한 느낌이 드는 것은 주인공의 살아있는 의식 세계를 마치 내가 느끼 듯 따라가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각이 먼저 뇌를 컨트롤 하지만 활자는 뇌가 먼저 인지하고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에 상상력의 정도에 따라 호흡이나 몰입감이 달라진다. 그래서 책의 활자를 따라 뇌를 활성화시키며 나의 상상력을 총동원해본다.




<혈류>의 첫 시작인 인간의 복제 기술을 나열하는 장면은 마치 올더스 헉슬리의 최초의 디스토피아 소설로 알려진 <멋진 신세계>와 맥락을 같이 한다. 헉슬리 덕분에 일파만파 퍼져버린 디스토피아 이야기는 과학 픽션으로 확정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 소설이 나왔던 시기가 1894년이니 21 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 입장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자칫 식상할 법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을 복제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통제하고 삽입하는 과정은 <멋진 신세계>와 유사한 느낌이다. 그러나 과학의 진보된 상태에서 묘사한 구체적인 의학 용어와 실제의 의학계에 몸담고 있는 작가의 생생한 체험과 스토리 구성이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있다. 첫 장을 여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긴장감 넘치는 전개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손끝에서 뇌 속까지 짜릿함을 전달한다.




우연인 줄 알았던 폭발 사고 대통령의 죽음, 사실은 조작되었던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한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30대 중반의 평범한 한 가장이 있다.


폭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여러 차례 복제된 그래서 자신이 몇 번째 누구인지 고민하는 김종훈. 최초 복제 때 누군가 음모로 자신이 아닌 타인의 기억까지 갖게 된 주인공은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진 국가의 존망까지 걸려 있었던 배후의 사건들로 사건 이전과 달리 평범한 삶은 더 이상 살지 못한다.

복제 인간인지 아닌지 보다는 자신이 번민하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복제 여부를 떠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간의 윤리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인간의 윤리, 도덕, 가치 등의 이슈는 매일 상기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늘 우리가 안고 살아가는 문제이다. 가끔 너무도 닮은꼴을 만나거나 유사성이 많은 사람을 만날 때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떠올려 본다면 복제된 인간을 복제 사실을 인지하고 있더라도 마주하는 그 순간은 감정이 앞설 것이다. 인지를 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면. 존재가 없는 것보다는 함께 숨 쉬고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더 감사한 일이 될 것이다. 직접 닥쳐 보지는 않았지만 가족의 죽음을 경험했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소설의 상황이 현재 가능하다면, 아버지를 복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불완전한 복제 인간이더라도 대비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순간, 인생의 마지막 몇 달을 다시 한번 함께 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겠노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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