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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i Jun 11. 2019

커피소녀

June 2019



나는 술보다 커피다. 누군가에게는 술만큼 커피일 수는 있겠지만, 확실히 나는 술보다 커피다.

카페가 좋다. 힙한 곳에 가면 카페 3개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일단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한 잔 때리고, 그다음에 가서는 입가심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때려주고, 마지막은 좀 허한 속을 달래 줄 요량으로 빵까지 먹어주면 딱이다.

그래도 아무렴 커피를 생각하면 스타벅스다.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있을 때 우리 동네 메인스트릿에는 딱 하나의 스벅이 있었다. 처음에는 어찌나 주눅이 들던지 내가 너무 작게 말해서 알바생이 '왓?'이라고 말하려 치면 내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듯 '쏘리 빠이!'를 외치던 샤이걸이었던 적도 있었더랬다. 바닐라 발음을 제대로 못했더니 알바언니가 V발음을 알려준 기억, '푸라푸취노'를 주문하던 뉴요커의 발음이 멋있어 보여서 한동안 푸라푸취노를 마셨던 기억, 알바생이 뭐라고 뭐라고 너무 빨리 말해서 못 알아들은 채로 쿨하게 'yes!'라고 말했더니 팁으로 (무려 스벅에서!) 동전이 헌납됐던 웃픈 기억까지 취하지 않고도 취했었나 싶었던 카페인의 향기가 지금까지도 진하다.

한 번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친구랑 커피를-그 날도 무려 커피- 마시다가 무작정 제주도 표를 끊었더랬다. 목표는 하나, 한라산 백록담 등산. 아무 준비도 없이 열정과 패기만으로 무장하고 무작정 위로만 걸었는데, 등산 내내 스타벅스 아바라 스타벅스 아바라 오직, 스타벅스 아바라를 염불처럼 중얼거렸다. 백록담만 보고 축지법으로 내려가서 커피를 마셔야지. 난 벤티로 마실꺼야. 난 벤티를 원샷할꺼야. 난 할 수 있지. 백록담 보고 나서 마시는 커피는 얼마나 맛있을까 (나중에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빨리 등산하고 내려가서 흑돼지에 한라산을 마실 생각밖에 안한다고..) 그러고 나서 40km 떨어진 스타벅스 성산일출봉을 14분만에 도착해서 아이스바닐라라떼 벤티 사이즈를 원샷으로 딱 때리는데 손끝까지 퍼지는 짜릿한 시럽의 맛이란! 이건 나의 대체 불가능한 자양강장제! 키야!

심지어 여행에서도 빠질 수 없는 게 카페다. 아예 카페가 많은 곳을 여행 장소로 정해버린다. 멜버른이 그랬고, 도쿄가 그랬다. 하루쯤은 아무것도 안 하고 이 카페, 저 카페에 앉아 바깥만 쳐다보고 있는 게 얼마나 좋은데. 이방인인 듯, 동네 주민인 듯 요상한 경계 사이에서 혼자만의 줄타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도 나에게 주목하지 않음이 주는 편안함이, 자유로움이 기가 막히다.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말투 하나까지도 입방아에 오르는 세렝게티 같은 사회생활과는 완벽하게 다른 그 느낌은 언제나 늘 짜릿하다. 카페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가 제법 어른이 되었다고 느껴지는 기분 또한 사뭇 새롭다. 느긋하게 카페에 자리 잡아 책도 읽고, 사람 구경도 하고, 메모도 끄적이다가, 여행 계획도 세우고 서너 시간은 너끈히 노는 나를 보니, 혼자서는 움츠러들어 잘 못했던 어린이가 더 이상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어른이 별건가. 나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는 법을 아는 것부터가 시작인데.

카페가 좋다 얘길 하면 내 친구들은 '야 너 술집으로 가야지 카페 가면 안된다', 커피가 좋다고 하면 '남자들이 네 취향을 맞추기 힘들 거다'까지 별소리를 다 한다. 그래도 마음에 있는 말 없는 말 해가며, 후회도 얹어가며 정신없이 붕 뜨는 술보다는 중간중간 끼어드는 침묵에 바깥도 슬쩍 볼 수 있는 시간의 공간을 주는 커피가 더 좋은 걸 어떻게 해. 뜨거운 술 한 잔도 좋지만 차가운 커피는 눈비바람 상관없이 언제든 환영이다. 아바라 한 잔 마시러 갈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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