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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i May 25. 2021

따뜻한 나의 도시

1

남자는 연신 버스정류장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본다. 앞머리를 빗어 내렸다가, 관자놀이쯤에 손바닥을 대어 옆머리를 꾹꾹 눌러도 본다. 흘러내리지도 않는 에코백 어깨끈을 고쳐 매기도 하고, 에코백 밑바닥을 으쓱하니 쓸어 올기기도 한다. 아무래도 do you read me?라고 쓰여 있는 헐거운 에코백이 어색한 모양인데, 아마 남자도 자신이 에코백을 들고 나올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던 눈치다. 만지작만지작. 에코백에 꽃 몇 송이라도 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뭔가가 비스듬하니 삐죽하고 나와 있다. 배드민턴 라켓.


 퇴근을 할 때만 해도 남자는 지금 이 버스정류장에 이렇게 서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남자는 점심 먹고 사무실로 올라오는 때쯤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양말과 구두 모두 물구덩이를 거침없이 지난 듯 흠뻑 젖었기 때문에 오후 내내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발에서 이끼가 자라는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을 빨리 씻어 내고 싶었다. 보송보송한 발을 되찾은 후에는 그냥 방바닥에 널브러지고 싶었다. 시원하면서 포근한 그 방바닥의 한기를 양 팔에 그득히 느끼면서. 한겨울에 창문을 열어젖히고 나서 얼른 전기장판을 켜고 누우면 느껴지는, 얼어 드는 차가움과는 사뭇 다른 그 시원함, 에어컨 바람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눅지면서도 청명한 그 여름 기분이 남자에게는 절실했다. 그리고 그렇게 불도 켜지 않지 않고 땅바닥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까지 까닥거리게 되었다. 그리고 보니 오늘이 초복. 한여름의 시작인데 등은 차갑고 간간히 부는 서늘한 바람에 실린 디퓨져 향까지. 오감이 만족스럽다.


이 어울리지 않는 디퓨져는 돌연 독립선언을 하고 덜컥 이 집 계약을 했을 때 내 옆에 있던 그녀가 사주었던 것인데,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있는 디퓨져는 너무 간지러워서 뜯지도 않고 두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포장박스가 너무 근사해 그냥 두는 것으로서 인테리어를 완성하겠다란 말을 했던 것 같다. 그 밖에도 그녀의 취향은 나랑 참 맞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베를린 여행에서 남자의 선물이라며 누런 천 쪼가리로 만든 에코백을 내려놓은 것이다. 아니 번거로워서 지갑은커녕 카드 한 장만 핸드폰 뒤에 붙여 다니는 와중에 에코백이라니. 만나는 사람을 그렇게 모르나. 귀를 뚫지 않은 그녀에게 귀걸이를 선물했더라면 나는 아마도 토라진 그녀를 달래느라 24/7 진땀 났을 텐데. 그녀와는 제법 쌀쌀한 늦가을쯤에 헤어진 바람에 이따금씩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이면 바람을 타고 그녀가 온다. 우리가 손잡고 걸었던 어느 길 끝에 놓이기도 한다. 남자는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는데, 그녀가 다시없을 유일무이한 첫사랑이자 끝사랑이라서가 아니라, 있다가 없을 때의 그 공허함을 다시 느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30대 후반. 그런 풋내 나는 느낌은 싫었다. 호기롭게 독립까지 해서, 퇴근을 하면 다음 날 출근 때까지 입을 떼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남자는 그럴수록 꼭 맞는 취미를 갖고 싶었다. 나를 갉아먹지 않고, 더욱 나다워질 수 있는 멋진 취미가 필요했다.  


“어디예요?”


남자는 여자의 캐주얼한 카톡이 언제부터 신경이 쓰였다. 동네 조그마한 책방에서 하는 일회성 모임에서 두어 번 만난 사인데 여자의 붙임성이 워낙 좋아 뒤풀이에서 금방 친해졌다. 심심했는데 여자가 이야기해주는 영화나 책들은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동네 친구가 생긴 것 같아 재밌었다. 여자는 심심하면 사람들 꽤 있다고 책방으로 오라고 했는데 남자는 왠지 오늘따라 그러고 싶었다. 지난주쯤 여자와 간단하게 밥을 먹고 집으로 오는 길에 봤던 여자의 얼굴이 떠 올랐다. 뭐 그리 신이 났는지 잔뜩 들떠 이야기하던 그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뗬던 남자는 한낮의 열기가 식은 여름밤이 좋다고 생각했다. 갈게요. 하고 짧게 답한 뒤 남자는 평소에 잘 열어보지고 않던 서랍장을 헤집어 배드민턴 라켓을 찾아내 에코백에 넣었다. 그 여자가 지난주에 이 가방을 멘 것 같다. 빨리 그곳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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