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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i May 31. 2021

따뜻한 나의 도시

2

친구들은 옛날부터 그 동네에 볼 게 뭐가 있냐고, 신축도 아니고 낡은 오피스텔들만 있는데 물가는 쓸데없이 비싼데도 좋냐면서 눈을 흘겼지만 여자는 대학생 때부터 이 동네가 좋았다. 전형적인 회사 근처 오피스텔촌. 지하철역에서 깔끔한 정장에 구두를 신고 퇴근을 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면 왠지 모르게 조금 설렜다. 그래서 혼자 과제를 해야 하거나, 시험공부를 할 때에도 굳이 버스까지 타서 그 동네에 갔다. 여러 번 고배를 마셔 기업 로고만 봐도 부들부들 떠는 취준생일 때도 애들 몰래 그 동네를 찾았다. 그들처럼 사회의 속도에 오차 없이 발맞추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지하철 역 앞 카페가 끝날 때까지 앉아있기가 부지기 수였다. 여자는 어렸을 때부터 '무엇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현실성 넘치는 엉뚱함에 매 순간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돌연 삶의 어느 순간쯤엔 뒤쳐질 것이라는 생각에 항상 조바심이 나 있었다. 선도부가 되진 못하더라도 지각생만큼은 싫었다. 그래도 그렇게 좋아하던 이 동네로 이사를 온 걸 보니, 아직까지는 조바심이 좋은 채찍이 된 셈이다.


비가 안 온다. 아침이 저녁 같고, 어제가 그제 같은 구름 낀 회색 하늘을 40일 남짓 보다가 얼핏 회 푸른 하늘이라고 보니 미소가 지어진다.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든다. 런더너들은 매일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가, 시애틀에 산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여행을 못 가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 비가 와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어제 퇴근길에 갑자기 산 파란색 우산 -비를 맞으면 구름 모양이 드러난다는, 옅은 하늘색에서 짙은 파랑으로 진해지는 장우산-은 필요 없게 되었고, 어쨌든 출근을 해야 되지만 기분이 아, 기분이 좋다. 이제는 귀에 익어 시시해져 버린 플레이리스트를 대신할 유튜브를 켠다. 여자는 원래 유튜브는 거의 보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 무드에 맞는 노래를 예닐곱 정도 쭉 올려주는 채널을 유일하게 구독했다. 전곡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한두 곡은 마음에 쏙 들어 리프레시가 되는 느낌이 좋아 프리미엄 서비스까지 결재해버렸다. 마침 어제 새벽에 새로 올라온 리스트는 ‘드라이브하면서 듣고 싶은 곡’. 아무래도 꽤나 시끄러운 샤워가 될 것 같다.


9월이네.


가끔 '엄마, 몇 시야?'라고 시간을 물어볼 때면 항상 10분쯤은 빠르게 말하던데, 요즘 여자의 셈법이 엄마를 닮았다. 아직 8월이 절반이나 남았는데 벌써 구월이라니. 하루하루는 지루하게 바쁜데, 일주일은 무섭게 빠르다. 모두가, 모든 것이 주말을 향해 있어 생활주기가 7일이 된 것 같다. 5일을 조이고 2일을 푸는 삶. 오늘도 만만치 않은 하루가 예정되어 있는 걸 보니 조이는 게 아니라, 마냥 졸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하지만, 어떻게 될지를 매번 아는 것도 불행이지 않을까. 작은 한숨과 오늘의 생존을 다짐하며 올라탄 지하철은 아직은 한산하다. 두 역정도 지나치면 또 몰아 칠 것을 대비해 여자는 좌석들의 중간쯤에 자리를 잡는다. 전략이다. 이 시간에 문 앞에 딱 붙어 있다면 그냥 장마에 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랑 처지가 꼭 같아진다. 어차피 앉을 좌석이 없으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좌석의 중간쯤으로 쏙 들어가야 한다. 양 옆에 남자분들이 서면 밀릴가능성은 더욱 줄어든다. 건강한 삶을 살자 다짐했는데, 사무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피곤하다. 역시 마음대로 되는 일은 드물다.


'하이. 저 오늘 퇴근이 좀 늦을 것 같아서 30분쯤 늦춰도 되나요? 8시 30분!'


여자가 좋아하는 이 동네 사람들과의 유대감이 고팠던 찰나에 동네 초입 서점 주인과 친해진 것이 계기였다. 익명에 기대 만나는 것은 어딘가가 꺼림칙하니까, 아예 이 곳이 마을 어귀에 꼭 하나씩 있는 정자가 되어 보자고 작당모의를 하고 만든 여러 차례의 소규모 모임에서 여자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만났다. 부담스럽지 않은 범위 내로 그때도 그런 일상 중에 하루였던 것 같은데, 그날 따라 남자가 배드민턴 채를 가져온 덕분에 자연스럽게 시작된 건강한 삶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건강하려면 몸부터 건강해야 한다면서 바로 다음날부터 모인 사람들 중 몇몇끼리 시작했다. 다음 날은 몸이 놀랄 수 있다면서 보신부터 하자며 다 같이 곱창을 먹으러 갔지만, 그다음 만남에서는 배드민턴은 물론 맨손체조, 간단한 러닝, 암벽등반 등 돌아가면서 해보고 싶었던 운동을 공유했다. 그렇게 하길 벌써 3주, 여자는 그냥 일상에 이런 파동을 줄 수 있는 잔잔함이 좋았다.


'저도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은데, 저랑 뛰실까요?'


나도 8시 30분은 좀 빠듯했는데, 잘 됐다 좀 더 천천히 보자고 해야겠다 싶은데, 이 메시지, 개인 톡이다. 헷갈렸나. 알려줘야겠다. 싶은 그 때, 드륵 진동이 울린다


'둘이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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