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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뭐라도 걸치고 다녔을 거 아냐, 뭐 맨날 옷이 없대. 그래 놓고 죄다 비슷비슷한 색깔 살 거 아니야. 언제 샀는지 구분도 안 되게”
여자는 아차 싶었다. 여자와 지나는 서로 혼내고 혼나는 관계라 또 말 한 번 잘 못 꺼내서 가는 내내 싫은 소리 듣게 생겼다 싶었다. 주야장천 비만 오더니 이제 하룻밤 새 이렇게 바람의 온도가 달라질 일이냐며, 가을 옷들에 발이 달린 모양인지 어디에 들어가 있는지 기억도 안 난다고, 그래도 이번 가을엔 제대로 된 자켓 하나 사고 싶은데 이제 나이 들어서 함부로 못 사고 못 입는다고 얘기한 것뿐인데 팩트로 린치를 당했다. 물론 지금도 언제 이런 옷을 샀지 싶은 면티들 중 하나 대충 걸치고 나왔긴 했다. 남들이 하는 건 다 해야 하는 하는 관계로 산에 가겠다고 대차게 주중 한복판인 수요일에 연차까지 쓰고선.
“너님은 누더기 기워 입으세요? 반품도 안 되는 직구 좀 그만 해. 지난번에 보여 준 건 무슨 색 삼? 오긴 왔어?”
“아 그거 수박 색깔. 근데 진짜 깜짝 놀랐잖아, 그거 주문한 다음 날인가 왔다니까?”
“내가 누누이 말하는데 그렇게 튀는 색깔 좀 입지 마라고”
“너나 그런 검어죽죽한 것 좀 그만 입어. 홈웨어도 아니고”
냄비에 불이 지펴지기도 전에 답답하다며 튀어나올 개구리 같은 지나의 성향 때문에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여자와 지나가 친하게 지내는 건 한 때 유행하는 장단쯤으로 생각했지만, 아직도 우리는 매일을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지나는 드럽고 치사해서 한국엔 못살겠다며 제법 커 가는 스타트업을 하루아침에 퇴사하고는 신전떡볶이 알바생이 되었다. 정 붙인 어디에서든 떡볶이 장사를 할 모양이었는데 지속 가능한 떠돌이를 가능케 할 밥벌이로 제격이라는 게 이유였다. 맛있는 게 한국 생각도 안 나게 하면서 돈도 벌고 떡볶이가 얼마나 좋냐고. 여자는 그게 너무 현실적 이어 보이는 관계로, 지나가 이번엔 진짜 외국으로 갈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아 맞다, 그 런닝맨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언제부터.. 그 남자가 런닝맨이 되었을까?"
"됐고, 그 런닝맨이랑 엊그젠가 둘이 뛰었을 때 어땠어 뭐래"
"뭐 없지, 그 남자 나보다 페이스가 빨라서 쫓아가는데 목구멍에서 피맛 났어"
"야 너 지금 남자랑!!! 밤에!! 둘이!! 뛰는데.. 목구멍.. 피맛.. 아..... 구제불능.."
눈길이 간다. 왠지 꽂혀야 할 것 같은 날카로움이 어려 있는 시선이라는 말보다는, 눈이 머무는 방향에 길을 만들어주는 낭만적인 이 문장을 여자는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여자는 어느 것에도 선뜻 눈길을 주지 못했다. 이 소중한 문장의 목적어는 특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항상 무언가에게, 누군가에게 눈길이 머물기에는 그 대상이 완벽하게 매력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충분하지 않은 본인의 문제였다는 걸 여자는 얼마 전에 알았다. 그때 '그래도 진짜 매력적이었다면 내가 마음을 고쳐먹었겠지' 하는 자기 위안이 금방 하고 떠오른 건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누차 아니라고 말해도 매번을 기다고 말하는 지나 때문에 지치기도 했지만, 이번엔 지나 말을 반쯤은 믿고 싶기도 했다. 즐거운 눈치는 아닌데 매번 오고, 좀처럼 말을 먼저 하는 법은 없지만 시키면 잘하는, 세상 무기력한 것 같은데 관심사가 화제일 경우에는 생기가 도는 이 남자는 확실히 여자와는 전혀 다른 범주의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무언가를 같이하자고 텔레파시 같은 걸 보내는 이 남자가 도대체 어떤 성향인지 그의 MBTI가 궁금해졌다.
"아 근데 그런 거 있잖아, 좀 특이한데 밉지는 않고, 그냥 챙겨주고 싶고, 그냥 그러긴 해."
"야 그게 호감이야"
세상에서 많지 않을 그런 사람에게 여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