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i Nov 23. 2021

따뜻한 나의 도시

4

이 색은 너무 튀는 거 같고, 이 옷은 너무 출근복 같고, 청바지는 안 어울리고, 이 옷에는 신을 신발이 없고, 이 옷에는 걸칠 외투가 없다. 이건 뭐야, 이 옷은 왜 산거지. 댕근에 팔까. 매사를 준비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편이지만 옷에 대해서는 가늠이 안된다. 누군가에게 환심을 사고 싶은 것도 아니고, 패션피플이 되고자 하는 것도 아니면서 유독 옷장앞에만 서면 10분, 20분은 그냥이다. 바로 눈앞에 옷들이 한 꾸러미가 있으면서도 머릿속에 생각나는 건 항상 작년에 입었던 옷들이다


'엄마 그 옷 못 봤어? 녹색 초록색 반반해서 두툼한 니트있잖아'

'그 옷을 잘 모르겠는데? 언제 입었지'

'작년에 엄청 추웠던 날에 내가 그거 입고 나가는 데 엄마가 뭐라고 했잖아'

'몰라. 기억 안나지. 걸려있는 것 중에 입어'


또 시작이네, 피식. 엄마와 나의 모닝 루틴이다. 그냥 나는 거적때기만 걸쳐 입는 옷 거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내 체형을 분석해서 나같은 체형이 입으면 어울리는 옷만 모아주거나, 아님 이 체형 전문으로 쇼핑몰을 하나 열어주었으면 좋겠다. 키로만 롱/아담 이렇게 나누지 말고 좀 더 다양하게, 색깔도 명도와 채도에 맞춰서 구분자를 걸어주고, 포멀룩, 비지니스캐쥬얼, 캐쥬얼,  아방가드르, 걸리쉬 등등 상황별로도 나눠줬으면 좋겠다. 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옷입고 15분 내로 나가야 한다. 1시간 뒤에 병원 예약이 되어 있고, 타야하는 버스가 20분 뒤에 온다. 이 버스를 타지 못하면 이 추운 날 밖에서 15분을 기다리고도 예약에 늦어 간호사 언니한테 쓴소리를 듣거나, 택시를 타야한다. 아 택시, 남들 다하는 투자와는 담을 쌓고 지내다 보니, 버는 것도 없는 주제에 이런 푼돈이나 아끼자 하면서 요즘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택시를 탄 건 2달 전 쯤인데, 밥 먹고, 술 먹고,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비틀거리며 거리에 나선 시간이 하필이면 자정, 하필이면 강남이라 1시간 남짓을 걸어 논현가구거리를 지나 학동역쯤에서 웃돈까지 얹어 부른게 마지막 기억이다.


'너 예약 몇 시랬지?'

빨리하고 나가라는 소리다. 아 추운데 패딩을 입어야 하나, 코트에 목도리하면 괜찮을라나, 아 요즘 발이 너무 시리던데 부츠 신으려면 뭐 입지. 아 진짜 시간 없네. 그냥 어제 출근할 때 입은 옷 그대로 입고 나가야겠다. 회사가는 것도 아니고 어제 옷이라고 아는사람도 없는데 뭔 상관. 아 차도 없으니 롱패딩이나 사야겠다. 롱패딩은 옷이 아니라 이동수단이라고 했으니까.


'내가 저녁에 뭐 입을지 생각해 놓으랬지. 저렇게 쌓아두고는 나갈때 보면 맨날 거적대기같은걸 입고 나가. 그럼 저거 다 갖다 버려'

'저거 언젠가는 다 입을꺼고, 다 내 돈이고,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몰래 버리지 마, 나 간다~'


엄마는 정리정돈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딱히 둘 곳이 없으면 아예 사질 않는다. 주객이 완전히 전도됐다. 나는 나대로 쓴 맛, 떫은 맛을 보며 버는 돈인만큼 소비의 달콤함에 중독되었으나, 엄마의 영향을 어느정도 받았기 때문에 물건을 가지런하게 쌓아두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이유로, 내 방이 넘쳐나는 옷들로 정신 없다는 이유로 나 몰래 옷을 버리고 하는데 그 사실을 몇 주 뒤에나 눈치 채는 나도 문제가 있다. 너덧개 있는 검은색 목폴라티, 검은색 반폴라티, 4년전에 산 코발트색 니트 등등. 아무튼 나름의 엄포를 부리고 나왔으니 당분간은 나몰래 옷을 버리진 않을 것이다. 집 바로 뒤에 있는 버스정류장까지 빠듯하다. 제발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신호가 바뀌고 나를 기다려줘야 아마도 놓치지 않을 것 같아 엘레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뛴다. 계단 진입. 한 번 이 계단에서 삐끗한 아주머니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조신다급하게 내려가면서 밖을 곁눈질해보니 아뿔싸 버스가 와 있다.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이미 건너고 있다. 모래시계 눈금도 몇 개 남지 않았다. 내려가면 바뀔 것 같다.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주문을 걸어본다. 두어 눈금읖 남기고 횡단보도를 들어서고 냉큼 버스 기사 아저씨를 쳐다봤다. 제발 문 닫지 마세요. 겨울이잖아요. 너무 추워요.


배신자. 나는 빨간불로 바뀌자마자 정류장에 들어섰고, 버스는 정말 바로 출발했다. 파란불만 기다린 레이싱카처럼 부릉더리다가 신호가 바뀌기 무섭게 쌩하니 떠났다. 버스기사 아저씨는 분명 나를 봤다. 내 눈을 봤고, 안절부절한 내 마음을 읽었다. 그랬는데도 문을 닫고 출발을 하다니. 험한 말이 오장육부를 돌아다닌다. 저렇게 뒷모습을 보이는 저 버스도 화가 나고, 겨우 어제 입을 옷 또 입을거면서 꾸물거린 나한테도 화가 난다. 어쩌다 한 번 있는 일도 아닌데 매번이 왜 이렇게 화가 날까.


이럴때면 예전에 같은 일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쓴다는 어플에서 받은 피드백이 생각난다. ‘그 기사님도 배차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을테니 이해해보도록 해요’


저 사람도 언제가는 누군가의  아주 작은 호의, 어렵지 않은 배려를 필요로 했을텐데 이렇게 모른척할 수가 있는 건지 무섭다. 사람들은 왜 왼쪽 팔뚝에 완장이 채워지면 다들 이토록 알량하게 변해버리는건지. 역할마다의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알지만 이해는 어찌나 상대방의 몫으로 두는건지. 아 이럴때면 나 좀 데려다 줄 수 있는 사람 없나, 좀 외로워 진다. 휴. 여자는 짧은 한숨을 쉬며 이어폰을 찾아낀다. 18분 남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따뜻한 나의 도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